조항

 





“진실로 나의 징표들을 부정하는 자들은, 내가 그들을 불 속에 들게 할 것이라. 그들의 피부가 다 타버릴 때마다 내가 그들에게 새로운 피부를 주었으니 그들이 고통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라.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존엄하신 분이시며 가장 현명하신 분이시라. 그러나 (하나님과 예언자를)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 나는 그들을 천국에 들어가도록 할 것이니 그 아래에는 강들이 흐르며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거주할 것이라.”





                                                 (성꾸란 4장 56-57절)





  태국 치앙마이 대학교의 해부학과장 테자센(Tagatat Tejasen) 교수는 고통 수용기 연구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였다. 처음에 그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1,400년 전 꾸란의 언급을 믿을 수 없었다. 나중에 그는 번역된 꾸란을 구하여 해당 구절을 검증하였다. 테자센 교수는 꾸란 구절의 과학적 정확성에 깊이 감동받았으며, 1985년 한 의학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선언을 하고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5) 철(鐵, fe)의 근원에 대해 꾸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철을 내려 보냈으니 그 안에는 강력한 힘과 사람들을 위한 유용함이 있도다...” (성꾸란 57장 25절)





  최근에 증명된 바에 따르면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 모두는 외계(外界)로부터 철의 성분을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태양의 온도로는 철을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태양 표면의 온도는 섭씨 6,000도이며 중심의 온도는 약 2천만도이다. 그런데 신성(新星, novae) 또는 초신성이라는 이름의 고온(高溫)의 별은 그 온도가 무려 수십억도의 몇 백배까지 올라가는데, 바로 이 별들로부터 철이 형성된다. 이 철의 성분이 함유된 별이 폭발을 일으키고, 그 폭발의 파편들이 우주를 여행하다 다른 천체의 중력장(重力場)에 포획된다. 이것이 우리 태양계가 철을 얻게 되는 과정이며, 태양계에서 철이 만들어지지 않고 외계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어떻게 해서 꾸란은, 계시된 그 시절이나 그 이후 수 세기가 지나도 사람들이 알아내지 못한 이러한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는가? 그것은 언젠가 사람들이 “꾸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무함마드는 그분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것을 즉각 깨닫게 될 시간이 올 것임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꾸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그것(꾸란)이 진리임이 명확해질 때까지 나는, 여러 곳에 있는 그리고 그들 자신 속에 있는 나의 징표들을 그들에게 보여줄 것이라. 그대의 주님과 관련하여, 그분께서 모든 것의 증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성꾸란 41장 53절)





  테자센 교수는 꾸란에 언급된 단 하나의 ‘과학적 징후’의 힘에 복속하여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들은 열 가지 징후를 요구할 수도 있겠고, 다른 이들은 꾸란의 신학적 원천에 대해 확신을 줄 수 있는 수백 가지의 증명을 요구할 수도 있다. 수천 가지의 징후나 증거를 보고 나서도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꼭 닫힌 심성(心性)들에 대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그들은 귀머거리이며 벙어리이자 장님이니 그들은 (올바른 길로) 돌아오지 않더라.” (성꾸란 2장 18절)





“불신하는 자들의 예는 소리쳐 부르는 자를 듣지 못하는 존재(양떼)와 같나니 그것이 듣는 것은 오직 외침과 고함 뿐이라. 그들은 귀머거리이며 벙어리이자 장님이니 그들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더라.” (성꾸란 2장 171절)





“그들은 꾸란을 숙고하지 않는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이 닫혀있는가?” (성꾸란 47장 24절)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하나님은 꾸란을 통한 말씀에서 인간을 그의 대행자(Khalifah) 또는 이 땅의 관리자로 창조했다고 한다(2:30). 그러므로 인간의 기본 의무와 책임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것이 된다.





“내가 진과 인간을 창조한 것은 오직 그들이 나를 경배토록 하기 위함이라.”





                                                    (성꾸란 51장 56절)





   아주 간단하다! 사람을 창조한 목적은 창조주에게 경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예언자들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하나이다.





“오, 사람들이여! 하나님을 경배하라. 그분 이외에는 그대들이 경배할 존재가 없노라.” (성꾸란 7장 59절, 7장 65절, 7장 73절, 7장 85절; 11장 50절, 11장 61절, 11장 84절; 23장 23절, 23장 32절)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삶을 만든 것은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며, 모든 사람이 죽은 뒤 각기 그 행한 일들에 따라 보상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언급이 있다.





“그분께서는 죽음과 삶을 창조하셨으니 너희들 중에 누가 가장 훌륭한 행동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함이라. 그리고 그분께서는 가장 존엄하신 분이시며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분이시라.” (성꾸란 67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분을 잘 알아야 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비뚤어진 개념이 형성되어 우리가 방황할 수도 있다. 꾸란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주고 계신다. 예를 들면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에게 제시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의 답변에 관련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도록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에게 가르쳤다.





“말하라 : ‘그분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모든 필요로부터 자유로우신, 완벽의 통제자이시라. 그분은 낳지도 않으셨고 낳아지지도 않으셨으며 그분과 비슷한 것은 단 하나도 없노라.’ ” (성꾸란 112장)





  이로써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가 꾸란의 저자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데,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받아쓰라고 한 것을 공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로부터 어떤 경배를 받기를 원하는지 꾸란에서 밝히고 있다. 또 하나님은 꾸란을 통해 우리에게 이르되, 모든 예언자들은 똑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각기 그들 민족에게 왔으니 그 메시지는 곧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경배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 예언자의 처음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꾸란의 지적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초기의 경전들은 단순히 필기할 종이가 없거나 부족했기 때문에 잘 보전되지 못했으며, 가르침이 입을 통해 전해지는 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왜곡되었다. 둘째, 여러 종교의 성직자들이 당초에는 없었던 교리를 중간에 삽입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서기 386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에야 도입되었다. 초기의 종교들이 모두 변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를 마지막 예언자로 삼아 영원히 보전될 성서과 함께 인류의 인도자로서 그를 보낸 것이다. 하나님은 꾸란이 당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의 시험 장치를 마련했다.





“그들은 꾸란을 숙고하지 않는가? 만일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존재로부터 왔다면 그들은 그 안에서 많은 모순을 발견했을 것이라.”





(성꾸란 4장 82절)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오류나 모순을 발견하기 위해 꾸란을 세밀히 살피고 조사할 수가 있다. 실제로 이러한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종교의 경전에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한다.


 이슬람에 ‘맹목적 믿음’이 있는가?





  이슬람은 ‘맹목적 믿음’의 종교가 아니며, 오히려 사람들에게 논리 그리고 추론과 지성을 이용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는 종교이다. 하나님은 꾸란을 통해 사고하고, 판단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지능을 이용하는 것 등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강조했다. ‘생각’이나 ‘판단’이라는 말은 꾸란에 49회나 언급되고 있다.[1] 또한 하나님은 ‘이성을 지닌 자들’을 16회나 꾸란에서 언급하고 있으며[2], 제20장에서 ‘지성을 지닌 자들’이라는 용어를 2회 사용하고 있다[3].





  꾸란의 여러 장에서 ‘마음(al-fuād)’과 ‘가슴(al-qalb)’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 둘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 꾸란의 수십 구절에서는 또한 ‘명상과 사고(fikr 또는 tafakkur)’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억 또는 상기(想起, tadhakkur)’이라는 용어를 수십 구절에 등장시켜 그 중요함을 강조하고 주의를 촉구한다. 사고한다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늘리거나 얻기 위해서이며, 기억한다는 것은 잘 잊기 쉬운 관련 지식들과 사건들을 상기하고 스스로 생각해내기 위해서이며 이것은 특히 신앙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계신다.





“진실로 하늘들과 땅의 창조와 낮과 밤의 교체에는 이성을 지닌 자들을 위한 징표들이 있노라. 그들은 서서, 앉아서, 그리고 누워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늘들과 땅의 창조를 숙고하더라. ‘우리의 주님! 당신께서는 아무 목적 없이 이것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 찬미를 드립니다! 그러니 불(지옥)의 고통으로부터 저희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 (성꾸란 3장 190-191절)





 꾸란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그대에게 내린, 축복 가득한 책. 그들이 그것의 징표들을 숙고하고 이성을 지닌 자들이 깊이 생각하기 위함이라.” (성꾸란 38장 29절)





  꾸란에서 ‘알다(know)’ 또는 ‘지식(knowledge)’이라는 말의 어근 ‘일름(ʻilm)’에서 형성된 낱말은 865회나 발견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이 같을 수 있느뇨?...” (성꾸란 39장 9절)





“그리고 지식을 부여 받은 자들이 그것(꾸란)이 그대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 그리하여 그들은 그것을 믿고 그들의 마음이 그것에 순종하더라.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올곧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라.” (성꾸란 22장 54절)





  한편 꾸란은 신화(神話)나 환영(幻影), 어리석음과 무지, 맹목적인 모방, 억측과 편견, 변덕과 욕망 등의 심성(心性)을 완강히 거부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꾸란에서, 이 땅 위의 대다수 사람들이 방황하는 것은 억측과 추측, 그리고 무지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확증하고 계신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지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따른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길로부터 그대를 방황시킬 것이라. 그들은 단지 억측만을 따를 뿐이며 그들은 오직 거짓만을 말하더라.” (성꾸란 6장 116절)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의 모든 예언자들은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죽은 뒤의 삶을 믿을 것을 당부했다. 예언자들은 죽음 뒤의 삶에 대한 믿음을 매우 강조했으며, 사후세계를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믿음을 의미 없게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모든 예언자들이 죽음 뒤의 삶이라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변함없이(몇 천 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다루었다는 이 사실은 사후세계에 대해 그들이 선포한 지식의 원천이 똑같이 하나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며, 사람들은 특히 죽은 후의 삶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성실한 추종자들을 많이 확보하였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무엇이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조상들이 세운 신앙과 전통, 그리고 관습들을 포기하게 하였는가? 그들 자신의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소외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대답은 명료하다. 그들은 마음과 가슴의 능력을 활용하여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지각적 의식을 통하여 진실을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죽은 뒤의 삶에 대한 지각적 경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각적 의식 이외에 인간에게 이성적(理性的), 미적(美的), 그리고 도덕적 의식을 동시에 부여했다. 바로 이 의식이 감각적 자료로는 검증이 될 수 없는 진실과 관련하여 인간을 올바로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사후세계를 믿으라고 촉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미적, 도덕적, 이성적 의식에 호소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꾸란은 불신자들이 사후세계를 부인하는 확실한 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아주 명료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순전히 억측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길 ‘현세에서의 우리 삶 말고는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죽고 또 살며 우리가 죽는 이유는 오직 시간의 흐름일 뿐이다.’ 그것에 관해 그들에게는 어떠한 지식도 없노라. 그들은 오직 추측만을 할 뿐이라. 그들에게 나의 명백한 말씀이 낭송될 때 그들의 주장은 오직 ‘너희들의 말이 옳다면 우리의 조상을 데려와 보라’라고 말하는 것뿐이더라. 말하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살리시고 죽음에 이르게 하시며 그 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부활의 날로 너희를 모이도록 하시니라.’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더라.” (성꾸란 45장 24-26절)





  죽음 이후의 삶의 필연성에 관해 꾸란이 제시하는 여러 설명은 인간이 도덕적 의식을 갖추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실제로 만약 죽음 이후의 삶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의미 없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가 믿는 존재는 불공정하고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 신(神)으로서, 예전에 한번 인간을 창조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그들의 운명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그런 신이 될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공정하시다. 무고한 수백, 수천의 백성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며, 극심한 사회 부패를 조장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그들의 욕망 충족의 도구로 삼는 등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저지른 압제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 수명이란 매우 짧기 때문에, 또한 한 사람의 행위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적절한 처벌과 보상은 불가능하다.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과 사악하고 나쁜 사람을 똑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도덕적이고 미적이며 이성적인 능력을 갖춘 인간이라면 이러한 논리를 거부하고 사후 세계의 가능성을 시인할 것이다. 하나님은 꾸란에서 이러한 진리를 확인하고 있다.





“내가 너희들을 장난으로 창조하였다고 생각했던가? 그리고 너희들이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가?” (성꾸란 23장 115절)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과 그 둘 사이에 있는 것을 아무 목적 없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불신하는 자들의 억측이라. 그러하니 불신하는 자들에게는 불(지옥)의 재앙이 있도다.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과 대지에 해악을 퍼뜨리는 자들을 내가 동일하게 대우한단 말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사악한 자들을 내가 동일하게 대우한단 말인가?” (성꾸란 38장 27-28절)





“악을 행한 자들은 내가 그들을, 그들의 삶과 그들의 죽음에 있어서,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선행을 실천한 사람들과 동일하게 대우할 것이라 생각했단 말인가? 그들의 판단이 참으로 악하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진리로써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으며 그리하여 모든 영혼이 그가 얻은 것으로 보상을 받게 하고자 함이라. 그리고 그들은 부당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리라.”





                                                (성꾸란 45장 21-22절)





“그리고 나는 하늘들과 땅과 그 둘 사이에 있는 것을 장난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둘을 오직 진리로써 창조하였으나 그들 대다수는 알지 못하더라. 진실로 구분의 날(심판의 날)은 그들 모두에게 시간이 정해진 날이라.”





                                                (성꾸란 44장 38-40절)





꾸란은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영혼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불신하는 자들이 말하길 ‘우리에게 심판의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말하라 : ‘그렇지 않노라. 나의 주님, 보이지 않는 것도 아시는 그분께 맹세코 그것은 너희들에게 다가갈 것이라. 하늘들과 땅에 있는 티끌만한 무게의 것도, 그보다 더 작은 것도, 그보다 더 큰 것도 그분을 피해갈 수 없노라. 그 모든 것들은 명백한 책에 기록되어 있노라. (하나님과 예언자를)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을 보상하기 위해서라. 그러한 자들, 그들에게는 용서와 풍성한 양식이 있노라. 그러나 사람들이 나의 징표들을 멀리 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 그러한 자들, 그들에게는 가혹하고도 고통스런 벌이 있노라.” (성꾸란 34장 3-5절)





부활의 날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공정과 자비가 완벽하게 나타나게 된다. 천국의 기쁨이 그들을 맞이할 것이라 믿고 현세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고통을 감내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축복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다가올 사후세계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그 둘을 비교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와 곧 이행될 아름다운 약속을 맺은 자와, 내가 현세 삶의 향락을 맛보게 한 후 심판의 날 (지옥으로) 불러들일 자가 같단 말인가?” (성꾸란 28장 61절)





  사후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저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각자의 행위를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어  평화와 행복이 충만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모든 영혼은 죽음을 맛보노라. 그리고 나는 나쁜 것과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시험하며 너희들은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노라.” (성꾸란 21장 35절)


 왜 ‘꾸란’을 읽어야 하는가?





  꾸란은 인간생활을 규제하고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한 기본적 질서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를 소홀히 할 수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내용이 창조주의 완벽한 지식으로 언급되어 있다. 꾸란은 진리를 널리 밝히면서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초대하고 있는데, 인간의 운명과 각 개인의 숙명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꾸란은 사람들을 교육시켜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만듦으로써 인간을 가장 높은 도덕적, 지적, 사회적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더군다나 꾸란은 하나님 말씀 그대로이며, 창조된 것이 아니다. 꾸란은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에게 계시되었다. 그것은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에게 부여된 불멸의 기적으로 그의 예언자 직분에 대한 증명이며, 이후 세대를 위한 증거이기도 하다. 꾸란은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14세기 전에 계시된 이후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의 아랍어 형식이 완벽한 형태로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





  독자가 꾸란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무엇을 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 네 가지 중요한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스스로 묘사한, 실제 그대로의 창조주를 알 수 있음.





  2) 이 세상에서 삶의 목적과 각자가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음.





  3) 각자의 태도와 행동의 결과에 대해 의식하게 됨.





  4) 모든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음. 하나님에게는 경배와 복종을, 이웃 사람 모두에게는 공정함을 실천해야 하며, 사물을 사용할 때는 좋은 목적으로 써야 함.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것은 인간과 창조주의 관계를 확증하고 새롭게 하며, 유일하고 진정한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진정하고도 정확한 숭배행위를 회복함에 있다.





“...그러니 그들이 나의 부름에 응하도록 하고 나를 믿도록 하라. 그들이 올바른 길로 인도될 것이라.” (성꾸란 2장 186절)


  왜 이슬람인가?





  이슬람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며 또한 특이한 종교도 아니다. 본질에 있어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여러 단계에서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인류에게 전한 바로 그 종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조악한 혼합행위와 신학과 철학 등이 개입되어 이전의 종교는 변질되고 말았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가 최후의 예언자 및 하나님의 사도로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임무는 인간 삶에 있어서의 난제와 혼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과 신학에서 비롯된 왜곡된 믿음을 바로잡았다. 그는 우리의 창조주에 대한 순수한 일신론(一神論) 신앙을 복원하였으며, 하나님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숭고한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으며, 그분이 바라는 방식으로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명령에 따라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것도 포함된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 이전의 예언자들이 전한 계시는 현재 모두 왜곡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지막 최종적 계시(이슬람)를 따르지 않고서는 계시의 목적이 올바르게 성취될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꾸란을 통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의 날에 오로지 마지막 예언자가 전하는 계시에 따라, 이슬람을 믿고 따랐는가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결할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종교는 이슬람이라...” (성꾸란 3장 19절)





“이슬람 이외의 것을 종교로 삼길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내세에서 손실자 중의 한 명이 될 것이라.” (성꾸란 3장 85절)





  무슬림들은 현세의 삶이 다음 세상을 위해 준비된 시험이라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인간이 단순히 속세의 삶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세상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만약 어리석은 자가 ‘먹기 위해서’ 살고, 지혜로운 사람이 ‘살기 위해서’ 먹는다면, 더 지혜로운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다.


  어떻게 무슬림이 되는가?





  어떤 사람이 이슬람에 입교하여 무슬림이 되기 위해서는 순수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 증언(Shahaadah)’을 하면 된다. “아슈하두 알라- 일라-하 일랄라, 와 아슈하두 안나 무함마단 라수-룰라.” 위와 같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이슬람에 귀의하게 되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나는 하나님 이외에 경배 받을 존재가 없음을 증언하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언합니다.”





* 이슬람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