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항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법률을 통해 술과 마약을 금하셨는데, 술과 마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잊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마약과 도박에 쉽게 물든다. 한번 중독된 이상 인간의 욕망은 계속적인 자극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폭력과 부정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마이다 장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술과 도박을 통해 사탄이 원하는 것은 그대들 사이에 적의와 미움을 심는 것이며 그대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방해코자 함이라. 그러니 그대들은 주의하지 않겠는가?” [꾸란 5:91]





따라서 인간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나약해질 때가 있으며 그 시기에 우리는 죄를 짓기도 한다. 만약 하나님을 기억할 그 어떤 방법도 없다면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더 깊은 타락의 길로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률을 따르는 자는 꾸준히 하나님을 기억할 것이며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 자신을 고쳐 잡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알루 이므란 장에서 아래와 같이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중죄를 범하거나 자신을 방황시켜 악한 짓을 저질렀으나 하나님을 떠올리고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자들…” [꾸란, 3:135]





이슬람





현재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경배 시스템은 이슬람이다. ‘이슬람’이란 뜻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보통 이슬람을 설명하면서 얘기하길 ‘세 개의 계시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중 세 번째 종교’라고 하지만 이슬람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다.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선 보내신 예언자들이 한 목소리로 전한 종교, 그것이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아담의 종교이자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종교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아브라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었노라. 그는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는 무슬림이었노라.” [꾸란, 3:67]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인류도 한 종(種)이며 따라서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종교도 하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을 위한 종교나 인도 사람만을 위한 종교, 유럽 사람만을 위한 종교를 따로 만들지 않으셨다. 인간의 정신적, 사회적 필요는 어디서나 동일하며 인간의 본성은 첫 번째 인류가 창조된 이래 그 어떤 변화도 겪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슬람 이외의 어떤 종교도 받아들이시지 않으신다. 이에 관해 그분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은 아래와 같이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의 종교는 이슬람이라” [꾸란, 3:19]





“이슬람 이외의 것을 종교로 삼길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내세에서 손실자 중의 한 명이 될 것이라” [꾸란 3:85]





모든 행위가 경배 행위





이슬람의 시스템에서는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경배 행위로 승화될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길,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헌신하라 하셨다. 알-안암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말하라 : 진실로 나의 예배, 나의 제물(祭物), 나의 삶, 나의 죽음은 하나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님을 위한 것이라.” [꾸란, 6:162]





그러나 이러한 헌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다음 두 가지 기본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





첫째 ; 행위는 진실되게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믿는 자가 행동을 실천하기 전에 주의해야 할 사항은 그 행위가 하나님이나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금지한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세속의 행위를 경배 행위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에게 아주 조그만 행위일지라도 짧은 기도문을 말할 것을 지시하셨다. 가장 짧은,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뿐만 아니라 각각의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다른 기도문들도 많다. 예를 들어 새 옷을 장만하여 처음으로 입을 때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오 하나님! 당신께 영광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입혀주셨습니다. 이 옷에서 나오는 선(善)을 얻고 이 옷을 입을 자로부터 나오는 선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요청 드립니다. 그리고 이 옷에서 나오는 악(惡)을 피하고 이 옷을 입을 자로부터 나오는 악을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보호를 구합니다.[33]





둘째 ; 행위는 예언자의 행동 양식과 일치해야 한다. 예언자의 행동 양식은 아랍어로 ‘순나’라고 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자들이기에, 모든 예언자들은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신의 행동 양식을 따르라고 하였다. 예언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진실이었고, 예언자의 방식을 따르고 진실을 받아들인 자들만이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요한복음 14:6에 기록된 예수(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동일선상에서 압둘라 이븐 마쓰우드가 전하길, 어느날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땅바닥에 선을 하나 그은 후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라.” 예언자는 그 후 (그 직선의) 좌우에 여러 갈래의 선을 그은 후 말씀하시길 “이것들은 [방황의] 길들로서, 각각의 길마다 악마가 있어 그 길들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노라.” 그런 후 예언자는 다음 절을 낭송하였다. “진실로 이것이말로 올곧은 나의 길이라. 그러니 그대들은 그것을 따르라. 그리고 (다른) 길들을 따르지 말라. 그것들은 그대들을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노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명령한 것이니 그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위함이라.[34]”[35]





따라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일한 방식은 예언자들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에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행위(아랍어로는 ‘비드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사악한 짓이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말씀하시길,





“가장 사악한 짓은 종교에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행위(비드아)이며, 비드아에는 저주가 있을 것이며 그것은 사람들을 불지옥으로 인도하노라.”[36]





이슬람에서 비드아는 금지되며 하나님께서는 비드아를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을 그의 아내 아이샤가 전하길,





“우리의 것에, 우리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거부될 것이라:”[37]





기존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왜곡되고 오늘날 여러 거짓 종교들이 성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종교에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행위(비드아) 때문이다. 비드아를 피하는 방법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행위와, 진실된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전해준 행위, 이 두 가지 종류 말고는 그 어떤 행위도 경배 행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일반 원칙을 잘 지켜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피조물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대등한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 그분에게 자녀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위에서 언급된 일반 원칙에 따라]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으뜸이다. 즉, 인간은 그 창조의 위대함에 있어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진 않지만,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훌륭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알-바이이나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계신다.





“진실로,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 그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피조물이라” [꾸란 98:7]





가장 무거운 죄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죄는 창조의 목적에 모순되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압둘라가 전하길, 그가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에게 어떤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크냐고 물었고 그가 대답하시길,





“하나님께서 그대를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대등한 존재를 두는 행위가 가장 무거운 죄라.”[38]





하나님 이외의 존재를 경배하는 행위 -아랍어로는 쉬르크- 는 용서되지 않는 유일한 죄이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죽은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지만, 단 쉬르크만은 예외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안-니싸 장에서 언급하시길 :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대등한 존재를 두는 행위를 용서하시지 않으시노라. 그러나 그 이외의 죄에 대해서는 당신께서 원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푸시노라.” [꾸란 4:48]





하나님 이외의 존재를 경배하는 행위는 그분의 피조물에게 창조자의 속성을 부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러 분파와 종교들은 제각기 그들만의 방식으로 쉬르크를 행한다. 논쟁을 일삼는 소규모의 무리는 여러 시대에 걸쳐 항상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해 왔다.[39] 창조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들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이 세계에는 시작이 없다’ 라는 비논리적인 주장을 도입해야만 했다. 그들의 주장이 비논리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의 모든 사물에는 시작이 있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사물의 집합인 세계 역시 시작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한 논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이 세계를 만든 존재는 세계의 일부분이 될 수 없으며, 이 세계처럼 시작을 갖고 있을 수 없다. 세계에는 시작이 없다는 무신론자의 주장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쉬르크’에 해당하는 주장으로서 시작이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그분의 피조물에게 부여하는 행위이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진정한 무신론자는 항상 극소수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몇 십년 동안 지속된 공산주의 정권의 세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러시아인과 중국인은 계속해서 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 전능하신 창조자께서 안-나믈 장에서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말씀하시길 :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꾸란 구절)을 부당하고 거만하게 부정하였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것들을 확신하였더라.” [꾸란 27:14]





무신론자들과 물질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 삶이란 그들 욕망을 충족시킴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욕망에 순종하고 복종하니 하나님이 아닌 욕망이 그들의 신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알-푸르깐 장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





“그대는 그의 욕망을 자신의 신으로 삼는 자를 보았는가?” [꾸란 25:43]





기독교는 예언자 예수를 하나님과 영원히 공존하는 자로 만들어 그에게 창조자의 속성을 부여[40]하는 한편 예수를 ‘성자(聖子)’로 칭하여 그를 하나님의 인격체로 만들었다. 반면 힌두교는, 하나님께서는 ‘아바타르’라 불리는 육신화 과정을 통해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였다고 믿으며 또한 하나님의 속성을 쪼개어 세 명의 신에게 할당하였는데, 브라마에게는 창조자, 비슈누에게는 보존자, 쉬바에게는 파괴자의 속성을 나누어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쉬르크가 성립하는 또 다른 경우는 인간이 누군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탁하고 두려워할 때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바까라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인간들 중의 어떤 이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어, 마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더라. 그러나 믿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 어떤 종류의 사랑보다) 더 크노라.” [꾸란, 2:165]





누군가를 위한 사랑 혹은 그와 유사한 감정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클 때, 인간은 그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 불복종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감정이 몰입되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분만이 모든 피조물의 사랑과 두려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 아나스 이븐 말리크가 전하길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는 신앙의 달콤함을 맛볼 것이라 :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자;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께서 그를 이슬람으로 인도하여 주셨는데 다시 불신(不信)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자.”[41]





인간이 다른 이를 사랑하고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는 원인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창조물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인간은 삶과 성공을 사랑하고 죽음과 실패를 싫어한다. 그런데 그러한 삶과 성공의 원천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므로 인간은 그의 모든 사랑과 헌신을 그분께 마쳐야 마땅하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할 때 자신에게 이득을 주고 도와주는 자를 사랑한다. 그런데 모든 이득(7:188)과 성공(3:126)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므로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존재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세어보려 한다면 결코 그것을 셀 수 없을 것이라” [꾸란 14:34]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에 대한 지대한 사랑이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감소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동물에 대해 느끼는 사랑이 다른 인간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같을 수 없듯이[42]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을 초월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법률에 대한 복종을 통해 드러나는데 알루 이므란 장의 꾸란 구절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말하라 : ‘그대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따르라.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사랑해주실 것이라’”[43]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 역시 복종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만약 사랑하는 이가 무엇을 요구할 때 인간은 그에게 느끼는 사랑의 정도에 따라 그것을 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자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그분께서 사랑하는 자를 미워한다거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아부 우마마가 전하는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아래와 같다 :





“하나님을 위해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미워하며, 하나님을 위해 주고 하나님을 위해 주지 않는 자는 그의 신앙을 완벽히 한 자라.”[44]





따라서 올바른 신앙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모두를 사랑하게 된다. 마르얌 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분께서는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신앙인을 위한 사랑의 감정을 불어넣으신다.





“진실로,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 가장 자비로우신 분(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사랑을 불어넣으실 것이라. [꾸란 19:96]





같은 맥락에서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는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아래와 같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사랑하실 때 그분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불러 말씀하시길 내가 아무개를 사랑하니 너도 그를 사랑하라. 따라서 가브리엘은 그를 사랑하게 되노라. 그 후 가브리엘은 하늘의 거주자들을 불러모아 말하길 : ‘하나님께서 아무개를 사랑하시니 그대들도 그를 사랑하라’ 따라서 하늘의 거주자들도 그를 사랑하게 되노라. 그 후 그는 지구의 사람들로부터도 사랑을 받게 되노라.”[45]





기도





기도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기도에 응답해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요청한다면 그분께서는 기꺼이 응하신다.





“나의 종들이 그대에게 나에 관해 묻거든, 진실로 나는 가까이 있노라. 기도하는 자가 나에게 요청할 때 나는 그의 기도에 응하노라.” [꾸란 2:186]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이에 관해 강조하여 말씀하시길,





“네가 요청할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께만 요청하라. 도움을 구할 일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도움을 구하라.”[46]





따라서 인간을 향한 기도나, 죽은 자나 살아 있는 자를 중재자로 하는 기도는 ‘쉬르크’다. 기도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곧 숭배의 대상이다. 안-누으만 이븐 바쉬르가 전하는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기도는 숭배 행위라”[47]





“진실로, 너희들이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너희들과 같은 종들에 불과하노라” [꾸란 7:194]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이 성인에게 기도하는 행위는 ‘쉬르크’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테베 안토니우스 성인에게 찾아달라고 기도한다.[48] 유다 다대오는 수호성인으로서 불치병, 확신이 서지 않는 결혼 등의 경우에 기도의 대상이 된다.[49] 여행을 할 때는 여행의 수호성인인 크리스트퍼에게 보호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성인은 1,969년 교황령에 의해 성인 목록에서 영구 삭제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는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었던 것이다.[50]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기도나 미가엘제(祭)[51]에서 하는 천사들에 대한 기도 역시 쉬르크다. 성인 숭배를 꺼리는 기독교인조차도 예언자 예수를 통해 기도하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그는 쉬르크를 범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에게 기도하는 무슬림(이슬람 신자)이 있다면 그의 행위는 쉬르크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에게 아으라프 장의 다음 말씀을 추종자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말하라(오 무함마드여) : 나는 -하나님이 원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나 자신에게조차 유익함이나 해악을 통제할 힘이 없노라. 만약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많은 재산을 확보했을 것이고 나에게 어떤 나쁜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꾸란 7:188]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길, “그대의 가까운 친척들에게 경고하라,”[52]라는 구절이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에게 계시되었을 때 그는 친척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오 꾸라이쉬 사람들이여. (선행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응징을 피하시오. 나는 하나님에 관해 여러분들에게 그 어떤 힘도 없습니다... 오 무함마드의 딸 파띠마여, 네가 (현세에서) 원하는 것 무엇이든 나에게 요청하라. 그러나 나는 하나님에 관해 너에게 어떤 힘도 없단다.“[53]


 하나님은 왜 인간을 지구 위에 살도록 창조하셨는가?





인간 창조의 목적과 관련한 질문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에 관한 질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세상에 살도록 창조하셨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꾸란의 알-물크 장과 알-카흐프 장을 살펴보면





“그분께서는 죽음과 삶을 창조하셨으니 너희들 중에 누가 가장 훌륭한 행동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함이라. 그리고 그분께서는 가장 존엄하신 분이시고,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분이시라.” [꾸란 67:2]





“진실로 나[54]는 지구상의 것들을 아름답게 꾸며놓았으니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훌륭한 행동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함이라.” [꾸란 18:7]





따라서 인간이 이 세상에 창조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시험하시기 위해서다.[55] 이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 부유함과 가난함, 질병과 건강 등은 선한 영혼과 사악한 영혼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이다. 신앙심 여부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 행동으로써 식별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사항은 이와 같은 행위의 시험이 하나님께 인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인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다. 위의 시험은 심판의 날, 지옥의 거주자가 자신의 거주지가 지옥일 수밖에 없음을 납득시키는 역할을 하며 천국의 거주자가 자신의 거주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과 관련하여 행위의 시험은 다음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 첫째, 인간의 정신적 성장, 둘째, 응벌 또는 보상이 그것이다.





정신적 성장





이 세상에서의 시험은 무엇보다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목적으로 한다. 거친 금광석이 뜨거운 불을 통해 고순도의 금으로 바뀌듯이, 시련은 믿는 자의 품성을 성숙시킨다. 시련을 계기로 믿는 자는 원초적인 본능이 아닌 한층 높은 정신적 고귀함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믿는 자가 모든 시험을 다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통과하지 못한 시험일지라도 믿는 자는 그 시련을 교훈으로 삼고 미래에 있을 시험을 준비한다.





관대함과 자족감(自足感)





예를 들어, 관대함과 자족감은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곳이라면 예외 없이 가장 높은 덕목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만약 모두에게 동일한 양의 재산이 주어진다면 이와 같은 성품은 계발될 수 없다. 관대함은 재산을 모으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과 투쟁할 때만이 얻어지는 품성이다. 반면 자족감은 질투와 탐욕이라는 악의와 싸워 이길 때만이 발현되는 덕목이다. 창조주께서는 이 세상의 인간에게 각기 다른 양의 재산을 배분함으로써 이러한 정신적 투쟁에 단계를 두셨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안-나흘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양식에 있어 어떤 이들보다 다른 이들을 선호하셨노라.” [꾸란 16:71]





인간의 자연적 욕망 중 탐욕과 인색함은 비도덕적인 속성이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알려주시길, 재산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의탁물이다. 부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도 세상에 존재해 왔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지침에 의해 재산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그 재산의 소유주는 현세와 내세에서 그 재산에 의해 축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그 재산을 사용했다면 그는 현세에서는 저주를, 내세에서는 응벌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안팔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재산과 자식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계신다.





“그대들의 재산과 자식은 유혹에 다름 아님을 알라” [꾸란 8:28]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알-무나피꾼 장에서 믿는 자들에게 경고하길, 재산과 자식에 대한 욕망이 그분께 대한 복종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오 믿는 자들이여! 그대들의 재산과 그대들의 자식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라.” [꾸란 63:9]





"그분께서는 어떤 이들 위로 다른 이들의 위치를 높이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주신 것으로써 그대들을 시험하기 위함이라" [꾸란 6:165]





재산을 축적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욕심을 내는 것이 인간이다.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께서 말씀하시길,





“금으로 가득 찬 계곡을 가진다고 해도 인간은 또 다른 계곡을 원할 것이라. 그의 입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무덤의) 흙 뿐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참회하는 자를 용서해 주시노라.”[56]





이러한 부정적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명령하시길, 부유한 자들로부터 희사금을 모아 가난한 신앙인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들의 재산으로부터 희사를 받아 그들을 정화하고 그것으로써 그들을 깨끗이 하라.” [꾸란 9:103]





희사는 이슬람 초기 단계에서부터 규정된 사항으로 아랍어로는 ‘자카’[57](의무 희사)라고 한다. 믿는 자는 자신의 재산이 일정한 양을 넘어설 경우 정해진 비율만큼의 재산을 일년에 한 번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데 이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사항이자 신앙행위의 일부이다. 자카를 내지 않는 것은 막중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의무 희사를 통해 믿는 자들은, 재산이 그들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즉 그들은 재산의 일시적인 보관인일 뿐이며 재산의 일정 몫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란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묘사하는 진정한 신앙인이란 그들 재산의 일정량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남겨두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 재산에는 구걸하는 가난한 자와 구걸하지 않는 가난한 자를 위한 몫이 있노라” [꾸란 51:19]





그러나 자선금을 내는 것은 진정으로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선이 현세의 이득을 위한 것일 때 자선의 보상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하나님께서는 알-바까라 장을 통해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오 믿는 자들이여! 선행을 은근히 자랑하거나 해를 끼침으로써 그대들의 자선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말라.” [꾸란 2:264]





질투심은 재산에 대한 탐욕을 부추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다른 이들에게 준 것에 대해 욕심내지 말라고 하셨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안-니싸 장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보다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이 베푸신 것에 대해 그대들은 욕심내지 말라” [꾸란 4:32]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께서는 위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조언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하셨다.





“여러분들보다 적게 가진 자들을 보고, 여러분들보다 많이 가진 자들에게 눈 돌리지 말라.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것이라. 그럴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베푸신 것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58]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자들만을 볼 때 인간은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공평하게 대우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가진 것을 자기도 가지고 싶은 탐욕 때문에 결국 인간은 여러 죄를 저지르고 만다. 그러나 이슬람의 조언은, 자신보다 적게 가진 자들을 보라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항상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기보다 적게 가진 이들을 볼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여러 축복들을 떠올리게 된다. 질투심을 피하고자 하는 이러한 정신적인 노력을 통해 비로소 더 높은 차원의 만족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물질적 소유는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부(富)가 될 수 없다.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는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재산은 소유가 아닌, 만족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59]





만족한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아무런 개선의 노력도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수긍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자신의 경제적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운명 지으신 것을 마음 편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세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마음이 안정을 되찾으려면, 최선을 다한 후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라으드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보라. 하나님을 기억할 때 비로소 마음은 편안해지노라.” [꾸란 13:28]





시련





현세의 시험은 ‘불행’과 ‘시련’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과 시련은, 진정으로 믿는 자의 정신적 성장을 돕고 그들의 죄를 씻어준다. 반대로 불행이라는 현세의 시험을 통해, 잠시 방황하던 믿는 자들은 다시 올곧은 길로 돌아오게 된다. 불신자들에게 있어서의 시련이란 내세에 있을 고통에 앞서 미리 받는 현세의 고통이다.





인내심





시련은 더 높은 차원의 인내심을 계발하기 위한 토대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신앙심 깊은 자들이 현세에서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싸으드가 전하길, 그가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 누가 가장 많은 시련을 받게 되냐고 물었고 그(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예언자들이라 ; 그 다음은 예언자와 비슷한 자들, 그 다음은 그들과 비슷한 자들이라. 인간은 그의 신앙심에 따라 시험을 받노라. 그의 신앙이 견고하다면 그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고통은 커지며, 그의 신앙이 약하다면 그는 그의 신앙심에 걸맞는 시험을 받노라.”[60]





진정한 인내심은 시련의 시기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얻어진다. 주님께 의탁하는 것은 신앙 행위의 중요 부분이며 진정한 신앙심의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우주 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전적인 의탁의 대상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그 어떤 약속도 깨트리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출중한 신앙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이 같은 실수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실망시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유수프 장에서 야곱의 말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계신다 :





“모든 결정은 하나님께 있나니 나는 그분께 의탁하였으며 의탁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께 의탁하도록 하라” [꾸란 12:67]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확증하시길 우리가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한다면 가장 힘든 시기에도 그분으로써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 그에게 하나님으로써 충분하노라.” [꾸란 65:3]





하나님께로의 의탁은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굳건한 믿음에 기초한다. 그 믿음이란,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나쁜 것일 수 있으며 반대로 나쁜 것이 실제로 좋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알-바까라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리고 그대들이 꺼려하는 것이 그대들에게 좋은 것일 수 있으며 그대들이 좋아하는 것이 그대들에게 나쁜 것일 수 있노라. 하나님께서는 아시나 그대들은 알지 못하노라. [꾸란 2:216]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시련은 개개인의 필요와 환경에 최적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능력에 맞게 시련의 강도를 조정함으로써 그들이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견뎌낼 수 없는 혹독한 시련으로 시험을 받고 그러한 시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면 이는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처사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꾸란의 여러 구절을 통해 강조하시길 그분께서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불공정하지 않으신 분이시다. 알-카흐프 장에서 말씀하시길,





“그리고 그대의 주님은 그 누구도 불공정하게 대우하지 않으시노라” [꾸란 18:49]





하나님이 진정으로 공정하신 분이라는 뜻은, 인간이 겪는 시련이 그가 견딜 수 없는 능력 밖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주지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꾸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이 사실을 반복하고 알려주고 계신다. 예를 들어 꾸란의 제 2장 알-바까라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짐을 부과하지 않으시니” [꾸란 2:286]





또한 가장 존엄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길 인간이 직면하는 어려운 상황에는 항상 그 사이에 휴식을 위한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시련이 연속해서 온다면 인간은 결코 그 시련들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련 뒤에는 항상 휴식을 위한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알-인쉬라흐 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길 :





“진실로 어려움과 함께 쉬움이 있노라. 진실로 어려움과 함께 쉬움이 있노라” [꾸란 94:5-6]





절망





이러한 사실에 기인하여 이슬람은 자살을 명백히 금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안-니싸 장을 통해 말씀하시길 :





“그리고 그대들 자신을 죽이지 말라.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에게 가장 자애로우신 분이라.” [꾸란 4:29]





자살하는 자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창조주께서 그들을 불공정하게 대우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타락함은 불신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부정한 생각을 하는 그들은 따라서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든다. 그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삶은 불공정하다. 따라서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진실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체념하는 자는 오직 불신하는 사람들 뿐이라” [꾸란 12:87]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시길, 그분에 대해 사악한 생각을 품는 자에 대한 응벌은 지옥의 고통이라 하셨다. 알-파트흐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리고 남자 위선자들과 여자 위선자들, 남자 우상숭배자들과 여자 우상숭배자들을 벌하기 위함이라.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사악한 생각을 품은 자들이니 그들에게는 치욕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셨고 그들을 저주하셨으며 그들을 위해 지옥을 준비하셨도다. 얼마나 비참한 종착지인가.” [꾸란 48:6]





희망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공정과 자비를 약속하신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은 신앙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하나님을 믿고 올바른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 인내하고 노력하는 자에게는 그분의 자비를 희망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인내하는 자를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오 믿는 자들이여! 인내심과 예배로써 도움을 요청하라.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인내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노라.” [꾸란 2:153]





“진실로,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이슬람을 위해) 이주를 단행하고 하나님의 길에서 노력한 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희망하노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분이시고 가장 자애로우신 분이시라 [꾸란 2:218]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써 인내한 자, 그들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천국이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있을 보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다 :





“…그러나 인내하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 그들에게 시련이 닥쳤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하더라.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께 귀속되며 진실로 우리는 그분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꾸란 2:155-6]





인내는 또한 다음의 믿음을 기초로 한다. 즉 인간이 겪는 재앙은 그들 자신이 실천한 그릇된 행동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61]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성서 앗-슈라 장을 통해 이 사실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다 :





“너희들에게 닥친 모든 시련은 너희들 손이 얻은 것에 기인하노라. 그리고 그분께서는 많은 것을 용서해주시노라. [꾸란 42:30]





그러나 사실을 살펴보면,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른 많은 죄를 용서해주셨다. 만약 그분께서 그들의 죄를 엄격하게 벌하시길 원하셨다면 지구상의 그들 모두는 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파띠르 장에서 이 사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이 얻은 것을 벌하셨다면 그분께서는 움직이는 어떤 생명체도 지구 표면 위에 남겨두지 않으셨을 것이라.” [꾸란 35:45]





따라서, 좋은 것으로 시험을 받거나 나쁜 것으로 시련을 겪어도, 믿는 자에게도 모두 이익이다. 진정으로 믿는 자의 삶은 인간 행동의 극단의 두 측면, 그 가운데에서 균형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성공에 대해 너무 기뻐한 나머지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자들이 아니며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과 실패에 기죽어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은 후하게 베푸시는 그들의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결정을 따르고 수긍한다. 슈하입 이븐 시난이 전하길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믿는 자의 일상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그의 삶 모두가 그에게 득이 되니, 이는 믿는 자의 경우에 한해서라. 편한 시기에 그는 감사하는 자니 이것은 그에게 득이 되노라. 어려운 시기에 그는 인내하는 자니 이것 역시 그에게 득이 되노라.”[62]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운명을 받아들인 자의 행동 가짐이다. 따라서 운명 지어진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믿음은 이슬람의 여섯 번째 ‘믿음의 기둥’이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만약 믿는 자들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문젯거리도 없다고 느낀다면 이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자신의 삶에 대해 시간을 내어 숙고해보아야 한다. 시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자신이 그 시험을 의식하고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올바른 길을 벗어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앗-타우바 장을 통해 믿는 자에게 알려주시길, 많은 재산과 자식들로부터 얻는 불신자들의 즐거움이란 단지 그들에게 내려질 징벌의 서막일 뿐이다.





“그들의 재산과 그들의 자식들에 놀라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것들로써 현세에서 그들을 벌하시고 그들의 영혼이 떠날 때 그들이 불신자로 남아있게 하고자 하심이라.” [꾸란 9:85]





이 말은, 믿는 자가 현세의 삶에서 시련과 어려움을 바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우리의 주님, 우리 이전의 자들에게 부과하셨던 것과 같은 무거운 짐을 우리에게 부과하지 말아 주십시오.”[63] 대신 믿는 자들은 그들에게 닥치지 않은 시련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평온한 시기에도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다가올 시련을 항상 염두해야 한다. 종종 사람들은 당장의 성공과 행복으로 인해 앞으로 있을 시련에 둔감해지기 때문이다.





교훈





시험은 빗나간 자들에 대한 응징의 교훈이 되며 그들이 올바른 길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도와준다. 방황하는 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신에게 혹은 그 주위의 사람, 또는 소중한 사람에게 재앙이 닥칠 때면, 믿음을 가진 자는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진실로 나[64]는 그들에게 크나큰 고통 이전에 더 가까운 고통을 맛보게 할 것이니 그들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라.” [꾸란 32:21]





그들의 방황을 일깨워줄 재앙은 인간의 비인도적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던 보스니아 무슬림이 경험한 세르비아인들의 극단적 잔학 행위,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야만적인 쿠웨이트 침공과 그에 뒤따른 미국의 무차별 민간인 폭격 등이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길, 타인에 의한 인간의 고통은 그들 자신이 원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고통은 신앙의 길로 되돌아가게 하는 교훈이 된다.





“대지와 바다에 사악함이 드러났으니 이는 인간의 손이 얻은 것에 말미암은 것이라. 이로써 그분께서는 그들이 행한 것의 일부를 맛보게 하시니 그들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라.” [꾸란 30:41]





위선





시련을 통해 거짓으로 믿는 자가 누구인지 드러나며, 또한 자신의 의지로 지옥을 선택한 불신자들이 누구인지도 알게 된다. 신앙 이외의 이유로 이슬람으로 입교한 후, 입교 전보다 삶이 더 힘들어질 때 이전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안카부트 장을 통해 아래와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말했으니 이제 아무런 시련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인간은 생각하는가. 이미 나[65]는 그들 이전의 자들을 시험하였고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믿는 자들을 아시고 거짓말하는 자들을 아시노라.” [꾸란 29:2-3]





응벌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계를 넘어선 자들에 대해선 현세와 내세의 응벌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꾸란 전반을 통해 수많은 과거 세대들이 그분의 인도를 거부하였고 결국 그들 모두 멸망을 맞이한 사실을 묘사하고 계신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결과가 어떠한지 인간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한다. 안-누르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그(예언자 무함마드)의 명령을 어긴 자들은, 그들에게 시련이 닥치거나 또는 그들에게 고통의 벌이 닥칠 수 있음에 유의하라.” [꾸란 24:63]





벌의 형태는 다양하다. 인간에게 닥친 가장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벌은 오늘날의 모든 국가가 겪고 있는 에이즈[66]라는 병일 것이다. 의학 역사상 에이즈가 제일 처음 발병한 시기는 1980년대 초반이다.[67] 전세계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이 병에 걸린 자의 대부분은 성관계가 문란한 자들이다. 동성연애자가 가장 발병 확률이 높으며 그 다음은 양성애자, 그 다음은 성관계가 문란한 이성애자와 정맥주사로 마약을 복용하는 자들이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법률을 어긴 자들로서, 오직 결혼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남녀 사이의 성적 관계를 허락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며 마약 복용을 금지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몇몇 이들은, 에이즈가 수혈(輸血)이나 유전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학 통계를 보면 그러한 경우는 다른 카테고리에 비해 훨씬 적은 수치에 불과하다. 어찌됐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성서 꾸란의 알-안팔 장을 통해 경고하시길, 그분의 벌은 사악한 자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재앙을 두려워하라. 그것은 그대들 중 악한 짓을 저지른 자에게만 닥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응징하심에 엄하신 분임을 알라.” [꾸란 8:25]





1,400년 전에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는 그러한 시련이 다가올 것임을 미리 예언하셨다. 이븐 우마르가 전하는 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문란한 성생활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질 때, 그들에게 전례 없는 전염병과 고통이 도질 것이라.”[68]





그러나, 에이즈는 예견된 질병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미 에이즈 전에 포진(疱疹, 헤르페스)이라는 이름의 병이 도래했었고, 그 병은 1960년대와 70년대 사이 성생활이 문란한 자들에게 널리 퍼진 바 있다. 70년대 중반에 미국은 이 병을 전염병으로 규정하였고, 지금까지도 알려진 치료법이 없는 실정이다. 70년대 후반에 사람들의 주의는 포진에서 에이즈로 옮아갔는데, 포진이 죽음을 초래하는 병이 아닌 반면[69] 에이즈는 목숨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 꾸란에는 인간과 관련하여 세상과 그 속의 만물이 창조된 이유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브라힘 장과 알-안암 장에서 말씀하시길 :





“하나님 그분께서는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하늘로부터 물(비)이 떨어지게 하신 분이시라. 그리하여 그것으로부터 과일들이 맺어지니 그대들의 양식이라. 그리고 그대들을 위해 배(船舶)를 유용케 하시니 배가 그분의 명령에 따라 바다 위를 항해하더라. 또한 그대들을 위해 강을 유용케 하셨도다. 그리고 그대들을 위해 태양과 달을 유용케 하시니 그 둘은 정해진 궤도를 따르더라. 또한 그대들을 위해 밤과 낮을 유용케 하셨노라.” [꾸란 14:32-33]





“새벽을 여시는 분. 그리고 그분께서는 휴식을 위해 밤을 두셨고 (시간) 계산을 위해 태양과 달을 두셨도다. 이것이 바로 가장 존엄하시고 가장 잘 아시는 분의 셈법이라. 그리고 그분께서는 너희들을 위해 별들을 두셨으니 그것들로써 육지와 바다의 어둠 속에서 너희들이 방향을 잡기 위함이라. 실로 나는 아는 이들을 위해 징표들을 상세히 설명하였노라.“ [꾸란 6:96-7]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창조된 목적은 인간이 그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발명한 것 -예를 들어 선박- 이든 자연 그대로의 것이든, 그 모두는 인간의 유용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물에 대해선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과 자비를 인식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미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분께서는 앗-주크루프 장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가르쳐주시길, 동물이나 교통수단을 탈 경우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하셨다.





“(배와 가축을 둔 이유는) 그대들이 그것의 등 위에 올라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그 후 그것 위에 올라탔을 때 그대들이 그대들 주님의 은총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저희들을 위해 이것을 유용케 해주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저희들에겐 그것을 부릴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꾸란 43:13]





인간은 또한 자연을 사용함에 있어 하나님의 법률을 따를 책임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연을 사용할 때 그분의 법률을 준수할 것을 명령하셨다. 아부 사이드 알-쿠드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은 아름답고 푸르도다. 그리고 지고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이 세상의 관리자로 두셨으니 그분께서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실 것이라.”[70]





인간은 자연을 내키는 대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세속적 물질주의자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관점과 상반된다. 물질주의 사회는 자연을 정복해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들은 에베레스트 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반드시 정상까지 올라 산을 ‘정복’해야만 하는 그들은, 그 결과 매년 수명이 목숨을 잃는다. 진기한 동물의 왕국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들은 지난 세기 싸파리(사냥 여행)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동물을 죽였고 결국 많은 동물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 이는 단지 그들의 거실에 ‘1등 사냥꾼’ 트로피를 갖다 놓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는 싸파리가 사라졌지만,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든 동물들 중 코뿔소 같은 경우는 지금도 멸종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코뿔소의 뿔은 한약이나 최음제의 재료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동물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에 따르면 재미를 위해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금지되며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이븐 압바스가 전하는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살아있는 동물을 과녁으로 삼지 말라”[71]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금지된다. 단, 그 목적이 음식을 얻기 위한 것이거나 인간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옷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예외다. 재미로, 놀이의 방편으로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근본부터가 사악한 짓이다. 범죄의 응벌로서 사람을 처형하거나 음식을 위해 동물을 죽일 때조차도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샷다드 이븐 아우스는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의 말씀을 전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셨노라. 그러니, 누군가를 처형할 때 좋은 방식으로 처형하고 동물을 도살할 때 좋은 방식으로 도살하라. 도살 전에 칼을 예리하게 잘 갈아서 도살되는 동물이 편히 죽을 수 있도록 하라.”[72]





서구의 소위 ‘동물 애호가’ 중 일부가 이슬람의 도살 방법을 비판하지만, 정작 서구에서 사용하는 도살 방식이란 전기 충격이나 망치로 머리를 가격하는 등 동물에게 훨씬 더 많은 고통을 주는 것들이다. 아주 잘 드는 칼로 동물의 목을 베는 이슬람 도살 방식의 경우, 심장으로부터 뿜어진 피가 동맥 밖으로 곧바로 분출되기 때문에 동물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재빨리 의식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