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항




5. 진실한 무슬림은 최후 심판일을 믿는다.





이 세상에 언젠가는 종말이 오며, 사자가 부활하여 공정한 최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쌓은 행적, 우리가 가지는 의향, 우리가 하는 거동, 우리가 마음에 품는 생각,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 하나 하나가 모두 헤아려져 정확히 기록, 보존된다. 심판일에 이 모든 것이 심리(審理)될 것이다. 기록이 좋은 사람은 푸짐한 보상을 받고, 하나님의 천국으로 따뜻한 영접을 받을 것이다. 기록이 나쁜 사람은 형벌을 받아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진짜 성격과 그 정확한 모습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무함맏이 말한 대로라면, 천당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어 본적이 없으며, 마음속에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선행에는 보상이, 악행에는 형벌이 어김없이 따르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 날은 정의의 날이요, 마지막 총결산의 날이다.





인간이 만든 법의 처벌을 면할 수도 있듯이, 약삭 바르기만 하면 죄를 짓고도 벌을 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심판일에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비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입장을 대변해 줄 변호사도 없이 현장에서 체포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들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보실 수 있으며, 또한 그분의 대리자들이 일일이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경건한 사람이 있어, 선행을 베풀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도, 잠시 어울렸다가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사례나 찬사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날에는 결국 응분의 보상을 받을 것이며 널리 사례를 받게 될 것이다. 절대적 정의가 모두에게 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일을 믿는 것이 지금 세계가 당면한 복잡 다단한 많은 문제들을 풀어 주는 종국적인 해답이다.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부도덕한 행위에 있으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사업에 성공하고 생활이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덕망 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지한 노력에 응분의 대가가 따르기는커녕, 피해만 더 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있다. 이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도 대립하는 상황인 것이다. 죄진 사람이 세상법망을 피해 처벌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게다가 더 부유해진다고 한다면 덕망 있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선의 대의를 증진시킬 것인가? 선에는 보상을 하고, 악은 저지시키는 무슨 방법이 있어야만 한다. 비록 지금 세상에서는 이렇게 되고 있지만-주지하는 바와 같이 된다 하더라도 제때에 즉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어느 날엔가는,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니, 이날이 바로 심판날이다.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불의를 용납하고 해악을 묵인하려고 심판일이 있는게 아니다. 착취당하는 자를 회유하거나 착취하는 자를 안심시키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정로에서 벗어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조만간 완전히 구현되리라는 것을 다짐해 두려는 것이다.(예, 전기의 논급 창조)





6. 진실한 무슬림은 초시간적인 하나님의 지식과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믿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무관심하시지 않으며 수수방관 하시지도 않는다. 그분의 지식과 힘은 수시로 작용하여 그분의 관대한 영역에 질서를 유지하며 그분의 피조물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지혜롭고 사랑하는 분이시며,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반드시 선한 동기와 의미심장한 목적을 수반한다. 일단 이런 생각이 마음에 새겨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비록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것이 틀리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굳은 신앙심으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굳게 믿고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지식이 한정되어 있고, 우리의 생각이 개인적인 차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에 그분의 지식은 무한하고 그분의 계획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인간이 운명론자가 되거나 무력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사와 인간의 책임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줄 뿐이다. 우리는 날 때부터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기에 우리의 능력과 자유도 그 정도에 있어 유한하고 한정적이다. 우리는 만능이 아니기에 그분은 인자하시게도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으신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거나 우리에게 유한한 능력을 주시어, 우리의 유한성 및 책임한계와 균형을 이루게 하셨다. 한편 하나님의 초시간적인 지식과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가 자신의 한정된 능력 범위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며, 올바른 선택을 하라고 권유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거나 계획한대로 되지 않더라도 신앙심을 잃어버린다든지, 정신적 긴장이나 건강을 해치는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한번해서 안되면 다시 해 보아야 하며 그래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엔, 최선을 다 했으니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의 능력과 책임의 한계밖에 있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이런 신조를 가리켜 “까다와”와 “까다르”를 믿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초시간적인 지식은 사건을 예견하며, 사건은 하나님의 정확한 지식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 꾸란, 18:29, 41:26, 53:33-62, 54:49, 65:3, 76:30-31)





7.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무의미하게 창조하시지 않았으며 인생에는 인간의 육체적 필요와 물리적 활동을 초월하는 웅대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다. 완전한 은둔과 철저한 명상 속에 전 생애를 보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안다는 것이요,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분의 계율에 복종하고 삶의 곳곳에서 그분의 법을 시행하며, 옳은 일을 하고, 악을 피함으로써 그분의 대의를 세운다는 것을 것이며, 그분과, 우리 자신과, 같은 인간들을 공정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삶에서 도피하지 않고 삶을 사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고한 속성을 우리 몸에 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소박한 언명이 아니며,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포괄적이고 결정적인 언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에 목적이 있고, 인간이 그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창조된 것이라면,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부과하실 때는, 이 책임을 수행해 나가는데 필요한 도움도 함께 베풀어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행동방침을 결정할 수 있는 지능과 능력을 부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전력을 다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을 철저히 추구하라고 강권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생을 헛되이 보내거나 혹은 자기의 소임을 등한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악행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 (참조, 꾸란, 21:17-18, 51:56-58, 75:37)





8.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유의 위계 질서 속에서 인간은 특별히 높은 지위를 누린다고 믿는다.





인간이 이처럼 뛰어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행동 능력을 비롯하여 합리적 기능과 영적 열망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위가 뛰어날수록 그만큼 책임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부왕(副王)의 지위를 차지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대리자로 임명하여 활동하게 한 사람은 반드시 어떤 권력과 권위를 가지게 마련이며,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명예와 고결성이 부여된다. 바로 이것이 이슬람에서의 인간의 지위인 것이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저주받은 종족이 아니다. 훌륭하고 고귀한 업적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된 존엄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서 사도를 택하신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신뢰할 수 있고 유능하며 선의 엄청난 보물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꾸란, 2:30-34, 6:165, 7:11, 17:70-72, 90-95)





9. 진실한 무슬림은 사람은 누구나 다 “무슬림”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이것은 출생의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고 그분의 명에 복종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적인 잠재력과 지적인 성향이 있어, 이슬람에 올바로 접하고 그 천성이 향상되어 나가도록 놓아두기만 한다면, 이러한 잠재력과 성향을 통하여 그가 훌륭한 무슬림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슬람을 올바르게 전해 주기만 하면, 쉽사리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자손들의 천부의 열망을 비롯하여 윤리적 영적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개인적·사회적·국가적·세계적 차원에 걸쳐 건설적이고 건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신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은 인간성을 창조하셨기에 어떻게 해야 인간성이 가장 유익한가를 아시는 하나님의 세계 종교이기 때문이다. (꾸란, 3:30, 64:1-3, 82:6-8)





10. 진실한 무슬림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에는 죄가 없으며 덕을 유전 받았다고 주장할 권리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사람은 마치 아무 것도 써 있지 않은 책과 같은 존재다.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이 온전할 경우, 성인의 연령에 달하면 자신의 행위와 의사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는 한 죄에 구속되지 아니하며, 자신의 계획에 따라 스스로 책임을 지고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이 두 가지의 자유 곧 죄에 구속되지 아니하는 자유와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는 유전 받은 죄라는 무거운 짐에서 무슬림의 양심은 해방시켜 준다. 원죄의 교리가 야기하는 불필요한 긴장을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제거시켜 주는 것이다.





이슬람에 있어서의 이러한 자유의 개념은 하나님의 정의의 원칙과 개개인이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진다는 원칙에 그 바탕을 둔다.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하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누구도 타인의 죄는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아담이 원죄라는 것을 범했다고 한다면, 거기에 속죄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용서하실 수 없었고, 다른 누구에 의해 그 죄를 대속 시켜야 했다든지, 아담이 용서를 빌지 않았거나, 용서를 빌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가능성이 극히 희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속성과 용서의 권능은 물론이려니와, 그분의 자비와 정의에 어긋나는 처사일 것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상식을 철면피하게 무시하는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개념을 무모하게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제 9조 참조, 꾸란, 41:46, 45:15, 53:31-42, 아래의 죄의 개념 참조)





이러한 합리적 생각과 꾸란의 권위를 바탕으로 하여 무슬림은 아담이, 여느 지각 있는 범죄자가 그러하듯이,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고 믿는다. 또 마찬가지 근거에서 자비로우사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용서를 베푸셨다고 무슬림은 믿는다.(꾸란, 2:35-37, 20:117-122) 그러므로 무슬림은 아담을 비롯한 전 인류에게 유죄선고가 내려져 예수가 그 죄를 대속 하러 올 때가지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교리를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 결국 무슬림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전 인류의 죄를 단번에 제거하였다는 극적인 이야기를 환영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가 그릇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 둘 게 있다. 무슬림은 예수가 그 적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형의 교리는 그 바탕에 있어 그것이 인간의 논리와 존엄에 어긋나는 만큼이나 무슬림의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흐려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이슬람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높은 지위가 깍아내려진다든지, 하나님의 뛰어난 예언자로서 예수를 받드는 무슬림의 신념이 흔들리게 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교리를 배척함으로써 무슬림은 보다 더한 경애와 존경으로써 예수를 받아들이며 예수께서 원래 가져온 메시지를 이슬람의 불가결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무슬림이 되려면 하나님의 예언자 모두를 차별 없이 받아 드리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해 둔다. 이슬람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일반적 지위는 뒷장에 가서 더 논의될 것이다.





11. 진실한 무슬림은 인간은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구원을 얻으려면 신앙과 행동, 신념과 실천이 겸비되어야 함을 뜻한다.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없는 행동만큼이나 불충분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고 그 신념이 현실화되어야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본조는 이슬람이 여타 신조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말뿐인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진실한 신자라면 신앙의 실천적 요건에 관한 한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본조는 지적한다. 또한 그 누구도 타인을 대신하거나 그와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예, 꾸란, 10:9-10, 18:30, 103:1-3 참조)





12.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든 먼저 그에게 올바른 길을 보이지 않고서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많은 사도와 계시를 보내시고, 인도를 베풀고 경고를 발하기 전에는 징벌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소이(所以)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나 사도에 접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건전한 상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은데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그러나 알면서도 고의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거나 그분의 정로(正路)에서 이탈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으로 해서 처벌될 것이다.(꾸란, 4:165, 5:16 & 21, 17:15)





이 점이 무슬림 각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세상에는 이슬람에 대해 들어보지 못하고 이슬람을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도 이슬람을 애써 찾는다면 진실해질 수 있고 훌륭한 무슬림이 될 수도 있다. 알지도 못하고,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은 무슬림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을 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이슬람은 이런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무슬림들이, 이들을 이슬람으로 초대하여, 이슬람의 참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에게 말로써 이슬람을 전파할 뿐 아니라-더욱 중요한 것으로서-생활 속에 이슬람을 액면 그대로 실현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예, 꾸란, 3:104, 16:125)





13.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성에는 악보다는 선이, 절망적으로 실패할 가능성보다는 선도에 성공할 가망성이 더 많다는 것을 믿는다.





이런 신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과업을 부과하시고, 사도들에게 그를 인도하기 위한 계시를 보내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이 날 때부터 가망 없는 존재이고, 선도의 여지가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어떻게 절대적인 지혜를 가진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에게 책임을 과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식의 권고를 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모든 것이 허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살피고 관심을 쏟고 계시다는 사실이 인간은 무력하거나 가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선을 식별하고 선해지려고 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굳건하고 인간을 합당하게 신뢰한다면, 정녕 우리 세대에서도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꾸란의 관련 구절을 면밀히 연구하고 그 뜻을 음미해 보아야 한다.





14. 진실한 무슬림은 신앙이란, 이치를 따져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완전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신앙이 행동을 자극하고, 신앙과 행동이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기만이나 강요도 당함이 없이, 확고한 신념 위에 신앙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문의 전통 때문에 무슬림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나 강요를 받거나 맹목적으로 모방해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무슬림으로 보시지 않는다.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충분한 근거를 가진 신념 위에 자신의 신앙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심이 남아 있거나 반신반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신앙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연의 펼쳐진 책 속을 살펴보고, 추리력을 발휘하고, 꾸란의 가르침을 음미해 보라고 권유하신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를 찾을 때까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능력과 성의에 부족함이 없다면 틀림없이 그러한 진리를 찾게 될 것이다. (예, 꾸란, 2:170, 43:22-24 참조)





이슬람이 건전한 확신을 요구하고 맹목적 모방에 반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슬람은 진실하고 진지한 사상가로 정평이 나 있는 모두에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남김 없이 발휘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거나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생각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믿을 만한 종교 경전만을 의지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러한 경전은 그 자체로서 충분할 뿐 아니라 그로서는 여기에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요는 신앙이 건전한 확신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마음속에서는 의심이 말끔히 가셔 버리지 않는 한 누구든지 진정한 무슬림으로 자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건전한 확신과 선택의 자유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경우에만 이슬람이 완전한 것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그것이 강요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강요당한 신앙을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속에서 우러나오지 않거나, 자유롭고 건전한 확신에서 비롯되지 않는 이슬람은 진정한 이슬람으로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고로, 무슬림 국가에서 많은 비무슬림 집단이 완전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무슬림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슬람이 종교의 강요를 금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내부에서 비쳐 나와야 하는 빛이다. 선택의 자유가 책임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최선을 다해서 이들에게 강한 신앙심을 고취시켜야 한다.





건전한 바탕 위에 신앙을 확립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영적인 접근법이 있는 바, 이것은 주로 꾸란과 무함맏의 전승에 근거하는 것이다. 또한 합리적 접근법이 있는데, 이 방법에 의하면 결국, 지고한 존재에 대한 신앙으로 유도된다. 이렇다고 영적인 접근법에 확실한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합리적 접근법이 영성을 고취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양자는 상호 보완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활발한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 지식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으면, 합리적 접근법이나 영적인 접근법 혹은 두 가지 방법에 다 의지할 수 있으며, 자신이 내린 결론의 타당성에 자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할 능력이 없거나, 자기의 추리력에 자신이 없으면 영적인 접근법에만 국한해도, 믿을 만한 종교원전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에 만족할 수 있다. 요컨대, 영적인 접근법에 의하든, 합리적 접근법에 의하든, 혹은 이 두 가지 방법에 의하든 결국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모든 길은 그


본 장에서는 이슬람이 규정한 신앙의 실천사항을 다룬다. 이 가운데는 예배(쌀라), 단식(싸움), 자선-기부 혹은 “희사(자카)”와 순례(핫즈)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들 실천 사항을 명하신 방식이 이들 실천사항으로 하여금 영적인 제반목적에 합치하고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게 한다. 그 중에는 매일 실행해야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 주에 한 번·한 달에 한 번·일 년에 한번 실행해야 되는 것이 있고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실행해야 되는 것도 있다. 결국 이러한 실천 사항은 한 주의 모든 요일, 한 달의 모든 주, 일 년의 모든 달, 그리고 평생의 모든 해에 걸려 있는 셈이며, 특히 이러한 실천을 통하여 전 생애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게 되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행동과 실천이 없는 신앙은 이슬람에 관한 한 막다른 길목이다. 신앙이란 워낙 아주 민감하며, 극히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실천하지 않거나 그냥 내버려두면 생기와 동기유발 능력을 금방 잃어버리고 만다. 신앙에 생기를 주고 신앙이 그 목적에 합치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의 신앙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존속과 효과를 부여한다. 역으로 신앙은 인간을 고무하여 부단한 헌신과 꾸준한 실천으로 유도한다. 이것은 신앙과 실천의 상호관계가 매우 깊고 둘의 상호의존이 쉽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뚜렷하게 감화를 받을 만한 곳이 없고 따라서 성취하거나 열망할 만한 가치 있는 목적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의 생은 무의미하며 그날그날 살아가고는 있지만, 이렇게 산다면 아예 사는 것도 아니다. 한편 신앙을 고백해 놓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며 실제로는 신앙을 갖지 않은 것이니, 이런 사람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이 빗나간 사람이나 진배없다.





이슬람에서 신앙과 실천 사이의 상호관계는 종교제도 전체를 생생하게 반영하며 그 가르침의 심오한 철학을 드러낸다. 이슬람은 여하한 경우에도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종교와 실생활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인간을 받아들이며 영육으로 이루어진 그 본성을 인정한다. 이슬람은 인간의 영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영성을 무시한다며,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슬람은 또한 인간의 육체적 요구를 과소 평가하지 않는다. 육체적 요구가 없다면 인간은 천사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며 또 천사가 될 수도 없다. 이슬람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의 연속선상에서 중앙에 자리한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를 초월하지도 않는다. 하나님만이 오직 영적인 존재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로지 물리적·육체적 존재인 것만도 아니다. 이런 부류의 존재는 동물이나 기타 이성 없는 피조물 외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처럼 상보적(相補的)본성을 갖는 존재이기에, 상응하는 요구와 상응하는 필요를 지닌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그리고 윤리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어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할 수 있는 종교는 이러한 모든 요구와 필요를 고려에 넣는 종교이며 인간의 영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육체적 욕망을 훈련하는 종교인 것이다. 이런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인간성의 어느 한 면을 억누르거나 균형을 잃거나 한쪽으로만 치우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심어준 본성을 무책임하게 무시함은 물론이려니와 그것을 부인하여 학대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이슬람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인간의 영적·물질적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종교를 사사로운 문제로 보거나 실생활 전반과 유리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종교란 공사를 불문하고 전체적인 인생행로에 눈에 띄는 흔적을 내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생활을 조직적으로 영위해 나가지 않는다면 생은 무의미하다. 이슬람이 사회 각 방면-개인적, 사회적 행위, 노동과 산업, 경제와 정치, 국가적, 국제적 제관계 등-으로 그 조직적 감각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나 또 같은 연유에서 이슬람은 “세속주의”나 성속(聖俗)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종교와 의미 있는 생활의 상호작용은 지극히 중요하다. 이것이 이슬람이 사회 각 방면으로 침투하여,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고, 인간에게 자비로운 건전한 방식으로 인간의 제반사를 지도하는 까닭이다.





참종교와 일상생활 사이의 이러한 필연적인 부합의 결과로서, 이슬람은 “엿새는 나 혹은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하루는 주님을 위해서”라는 식의 교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런 교리는 결국에 가서는 공허해지고 종교의 활기를 창백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교리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심히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며, 인간 자신의 영혼에 해로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 윤리적 욕구를 심각하게 무시하는 것인 바, 이러한 영적, 윤리적 요구는 물질적 욕망보다 더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필적할 만큼 중요하다. 그것은 또한 인간성을 위험하게 분열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불균형은 곧 타락의 징후이다. 마찬가지로 엿새는 수도생활이나 명사에만 몰두하고 하루는 자신을 위해 보낸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균형이 깨어지기는 매일반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행로는 이슬람이 제시하는 행로가 된다. 인간은 상보적 본성을 지닌 존재이고 피조계(被造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영혼이나 육체를 등한시하거나 어느 한 쪽을 다른 쪽보다 우위에 둔다면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영혼과 육체 모두에 자양분을 주고, 양자를 균형 있고 건전하게 육성시키는 것이 인간의 정의감과 성실감 그리고 의지력과 진실성을 가늠하는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 그리고 인간을 도와 이 시험에 통과시키고자, 이슬람이 신앙의 규칙적인 실천사항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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