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항

알라(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바로 이슬람의 기초를 이룬다. 주제가 매우 중요해서 철저하고도 이것은 명백한 논의가 요구된다. 명료를 기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간단한 논증을 하게 될 것이다.[1] 이것은 이 주제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거나 너무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참고 읽어 주기를 당부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혹은 경험과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하나님의 개념에 의문을 던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비록 이들이 박학한 지식인으로 자처하지만, 불안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주장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관심을 두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처해 있는 정확한 입장이다. 이렇게 하자니, 논의의 상당 부분이 마치 성인이 아닌 아이를 주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꾸며지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서는 젊은 무슬림에게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올바른 개념을 알려 주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은 비무슬림으로서 소위 하나님을 믿고 종교를 옹호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몇 가지 단순하면서도 초보적인 논증을 하는 것은 이상의 이유들 때문이다. 그러나 논증의 단순성이 오히려 많은 성인들에게는 심오한 사색을 유도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이러한 단순성은 바람직하고 창의적인 단순성이 될 것이다. 이러한 단순성 단체가 이슬람의 뚜렷한 특징이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가정마다 가장이 있고, 학교마다 교장이 있으며, 도시마다 시장이 있고, 주마다 주지사가 있으며, 국가마다 국가의 원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모든 산물은 어떤 생산자의 작품이며, 모든 아름다운 예술품은 어떤 예술가의 창작품임을 우리는 의심 없이 안다. 이 모든 것이 명백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구와 세계의 범상치 않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지는 못한다. 수려하고 절묘한 경치를 보여주는 자연의 미, 끝없는 하늘의 지평선, 그리고 그 지평선 멀리의 아스라함, 쉬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지는 낮과 밤의 교대, 해와 달과 행성의 궤도, 생물계와 무생물계, 대대로 이어지는 인간의 부단한 과정과 진보, 이 모든 것을 보고 인간은 종종 경탄해 마지아니한다. 우리가 더불어 살고 있고, 무한히 향유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 유지시켜 나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 자주 의문에 사로잡힌다.





거대한 우주를 설명해 낼 수 있는가? 존재의 신비가 납득할 수 있게 풀어져 있는가? 책임을 진 가장이 없이는 가정이 제 구실을 할 수 없고, 행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도시가 번창해 나갈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수반이 있지 않고서는 국가가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또 무엇이든지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게다가 우리는 우주가 존재하고 가장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존속해 오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과 인간의 존재를 단순한 우연에 맡겨 버릴 수 있는가?





인간이 단순히 우연에 생겨난 것이라면, 인간의 전 생애도 우연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그 전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여길 수 없으며,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한 자기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고 스스로 어떤 계획에 따라 행동의 모범을 설정하고자 한다. 개인이나 단체, 국가는 자기의 행동방침을 설정하고자 한다. 개인이나 단체, 국가는 자기의 행동방침을 계획하며, 용의 주도한 계획은 모든 어떤 원하는 결과를 낳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인간이 어떤 종류로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훌륭한 계획의 가치는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조그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세운 계획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 자신의 존재와 우주의 존립 역시 어떤 계획된 방침에 의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물리적 존재의 배후에 계획하는 의지가 있으며 사물을 존재하게 하고 질서 있게 운용시키는 유일무이한 정신이 세계에 있음을 뜻한다. 우리의 세계가 보여 주는 경이로움과 생명의 신비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는 만물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한 거대한 힘이 작용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는 가장 매력적인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내고, 만들어 내되, 그 존재에 어떤 특수한 목적을 부여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 힘은 모든 힘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이며 이 예술가는 모든 예술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다. 진실한 신앙인들과 사리에 밝은 사람들은 그분을 알라 혹은 하나님이라 부른다.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창조자이며 세계 제일의 건축가이며, 생명의 창시자이며 만물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부양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창조하거나 만들 수 없기에, 그분은 인간이 아니다. 그분은 어떤 동물이나 혹성이 아니며 우상이나 신검(身檢)같은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스스로 생겨날 수도 다른 것들을 창조해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분은 기계도 아니다. 태양도 달도 아니며 그렇다고 별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체계에 의해 통제되며 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모든 것들을 만들고 유지시켜 주는 분이기에 이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만든 자는 만들어진 것과는 다르며 그보다 위대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또한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 없으며 경이로 가득찬 이 세계가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세계에서 생성되는 부단한 변화가 그것이 만들어진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 바이며 만들어진 것이면 무엇이나 그것을 만든 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시키는 분, 인간을 창조하고 부양하시는 분, 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효율적인 힘, 이 모두가 하나로서 동일한 바, 알라 혹은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분이야말로 신비중의 신비이며, 만유 중에서 가장 지고한 분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책, 성꾸란은 이렇게 말한다.[2]





너희에게 밤을 만들어 주어 쉬게 하시며, 낮을 만들어 주어 볼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 진실로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은혜와 자비로 충만하시거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적도다. 너희의 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신 것을. 그 분 외에 신은 없나니, 너희는 어찌하여 그분을 외면하느뇨. 하나님의 표징을 부인하는 자들이 도리어 외면 당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땅을 만들어 너희의 안식처로 삼으셨고 하늘을 만들어 너희의 은신처로 삼으셨도다. 너희에게 형체를 주시되, 그 형체를 아름답게 하셨으며, 너희에게 맛나고 정결한 음식을 마련하여 주셨도다. 너희의 주,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니, 그분을 영예롭게 할지어다. 그분은 세계의 주이시도다! 그분은 살아있는 분이시며 그분 외에 신은 없나니 그분에게 요청하며 그분에게 진실하게 헌신할지니라. 세계의 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꾸란, 40:61-65)





너희에게 바다를 복종시켜, 그분의 명으로 배가 항해할 수 있게 하며, 너희가 그분의 선물을 구하게 하고 감사함을 보일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 그분은 천지의 만물을 당신께로부터 너희에게 복종시키셨도다. 보라, 진실로 그 가운데 숙고하는 자들을 위한 표징이 있으리니





(꾸란, 45:12-13)





전세계의 최고주인이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분은 알라(하나님)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는 분이시기에, 사람은 다만 성찰과 명상을 통해서만 그 분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무소부재하시며 그분의 큰 힘은 세계 어디에서나 작용하고 있다. 세계의 만물이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상, 인간은 그분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위대한 힘을 믿어야만 인류는 생명의 그 많은 신비를 가장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올바른 지식과 종교적 통찰력을 얻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며, 실행과 건전한 윤리에 이르는 정로(正路)요, 행복과 번영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지침이다.





일단,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은 다음에는 그분의 속성과 명칭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완전한 모든 것과 절대적 선은 그분에게 속하지만, 결점이나 악은 그 어느 것도 그분에게 해당이 없다. 특히 다음 사항을 알고 믿어야 한다.





1.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므로 동반자나 자식이 없으며 누구를 낳지도 누구에게서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분은 영원히 만인의 간구를 받으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 무엇도 그분과 동등하지 못하다.(꾸란, 112:1-4)





2. 그분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시며, 보호자요, 진실한 안내자이시며, 공평한 분이고 최고의 주이시며, 창조자요, 감시자이시며,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며, 전지(全知)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시며, 듣고 아시는 분이시며, 증인이요, 영예로운 분이시며 유능하고 유력한 분이시다.(예, 꾸란, 57:1-6, 59:22-24)





3. 그분은 사랑하는 분이요 부양자이시며, 관대하고 자비로운 분이시며, 부유하고 독립 자존하는 분이시며, 용서해 주는 분이요, 온화한 분이시며, 인내심 있고 안식(眼識)있는 분이시며, 유일무이한 분이요 보호자이시며, 재판관이요 평화로운 분이시다. (예, 꾸란, 3:31, 11:6,35:15, 65:2-3)





이러한 하나님의 명칭과 속성들 하나 하나가 성꾸란의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창조물에게 지극한 사랑과 친절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자비 속에 살고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헤아릴 길이 없으니, 이는 그분이 헤아릴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꾸란, 14:32-34, 16:10-18)





하나님은 지고하시지만, 생각 깊은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가까운 분이시다. 그분은 이들의 기도에 응하여 도움을 베푸신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이들이 지은 죄를 사하여 주신다. 그분은 당신과 화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환영하며, 결코 그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는 선량해지고, 옳은 일을 하며, 악을 멀리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분은 선함과 사랑이 지극한지라, 선하고 옳은 일만을 권하고 또 이를 가납하신다. 그분의 자비의 문은 당신의 후원과 보호를 진지하게 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 있다.(꾸란, 2:186, 50:16)





하나님의 당신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은 무한하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그분의 은총을 저울질 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출생시 이후는 물론 그 오래 전부터도 우리를 잘 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시되, 창조물 중 가장 좋은 형체를 주셨고 또 우리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온갖 감각과 능력을 부여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와 우리의 가족을 부양하신다. 그분은 인간에게 지성을 창조하시어 이해할 수 있게 하시며, 영혼과 양심을 창조하시어 선량하고 정의롭게 하시며, 느낌과 감정을 창조하시어 친절하고 인정스럽게 해 주신다.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획득하고 빛다운 빛을 보는 것은 그분의 자비가 있음으로서이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기에, 우리를 창조하시되, 그 형체를 가장 아름답게 하시며, 해와 달을, 육지와 바다를, 땅과 하늘을 식물과 동물을 우리에게 마련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이러한 모든 것들과 우리가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기타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만드시며, 인간에게 존엄과 지능을, 명예와 존경을 부여하시니, 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부왕(副王)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에게 희망과 평온을, 용기와 자신을 심어 준다. 하나님의 자비가 있으므로 해서 비탄과 슬픔을 치유하며,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성공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진실로 하나님의 자비는 고난에 빠진 자를 구제하며, 고통을 당하는 자의 기운을 북돋우며, 병든 자를 위로하며, 절망에 빠진 자를 일으켜 세우며, 궁핍한 자에게는 위안을 주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 삶의 곳곳에서 항상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당연시 한 나머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실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으며 정신적으로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잊거나 저버리지 아니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진지한 요청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자비와 사랑이 있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옳은 길을 보였으며, 사도와 성서와 계시를 보내 주셨다. 모두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고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낸 마지막 사도는 무함맏이며, 현존하는 가장 믿을 만한 하나님의 성서는 꾸란이다. 무함맏이 세운 관습과 꾸란의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운다. 만일 누가 죄를 짓거나 악행을 저지르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그분을 크게 거역하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존엄성과 존재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회개하고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쳐 하나님에게 되돌아서고 싶어하며, 하나님에게 성실히 용서를 구하고 정직하게 그분께 나아간다면, 그분은 정녕코 그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나 그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자신의 잘못된 태도를 깨닫고, 하나님께 되돌아오기로 작정한다면 틀림없이 용서받을 것이다. 이에 대한 꾸란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동반자를 세우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나, 이외에는 당신이 용서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시나니, 하나님께 동반자를 세우는 것은 실로 가장 가증한 죄이니라.(꾸란, 4:48,116)





이같이 말하라 : 스스로 그 영혼을 욕되게 하는 나의 종들이여! 하나님의 자비를 단념하지 말지니, 그분은 지극히 관대하고 자비로우사,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이라. 너희의 주께로 (회개하여)돌아서, 그분께 복종할지니라. 형벌이 너희에게 내리기 전에, 형벌이 내리고 나면 도울 자 없으리라. 그런 즉 너희의 주께서 너희에게 계시한 최선의 길을 따를 지어다. 형벌이 너희에게 내리기 전에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꾸란, 39:53-54)





이렇게 커다란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보답으로 우리에게 있는 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자라는 게 없으며, 독립 자존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보답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분에게 보답할 수 없거니와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은총과 자비에 값을 매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다만 선량하고,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할 줄 알며, 그분의 권고를 따르고, 그분의 법을 시행하며, 그분의 미덕과 속성들을 올바로 나타내고, 지상에서 그분을 정직하게 대리하고 진실하게 대표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존엄과 명예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은 우리를 노예로 삼고자 아니하신다. 두려움과 미신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복종시키고자 아니 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지위를 만물 위로 높이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굴욕을 주고자 아니 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어떤 규칙과 규정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든 그것은 결국 우리를 이롭게 하려는 배려다. 우리를 도와, 서로 화목하고 친절하게, 형제애를 나누며,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삶을 누리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귀어 큰 기쁨을 누리며,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을 찾게 해 주자는 의도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분에 대해 말할 것도 많다. 심오한 불가사의와 감동적인 경이로 가득 찬 이 세계는 마치 펼쳐놓은 책과 같아서,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읽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이 인간에게 보내 주신 많은 사도들과 계시들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러 오신다. 이러한 사도들과 계시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자연을 깊이 살펴보고 사도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극히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그분께 나아가는 정로(正路)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몇 가지 대표적인 꾸란 구절들을 다음에 옮겨, 본 논의를 결론짓기로 한다:





알라께서는 자신 외에는 신이 없음을 증언하시나니 천사와 지식 있는 자들 역시 그러하도다-그분은 정의의 수호신이도다. 그분 외에는 신이 없나니 그분은 강하고 지혜로운 분이시로다.(꾸란, 3:18)





알라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수호하시나니, 하늘과 땅의 열쇠들이 그분의 것이로다.(꾸란, 39:63-64)





알라는 창조를 시작하시고 또 창조를 거듭하시나니, 그분께로 그대가 돌아가리로다.(꾸란, 30:11)





하늘과 땅에 있는 무엇이나 다 그분의 것이니 만물이 그분께 복종하는도다. 창조를 시작하시고 또 창조를 거듭하는 분이 바로 그분이시니, 그분께는 지극히 쉬운 일임이라, 하늘과 땅의 가장 높은 지위가 그분의 것이니, 그분은 강하고 지혜로우시도다.(꾸란, 30:26-27)





이슬람의 의미(意味) (up)


이슬람의 어원은 아랍어 어근 “싸리마” 인데, 이 말은 특히 평화, 청결, 순종, 복종을 뜻한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이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을 뜻한다. 이 말의 원래 의미와 종교적 의미 사이의 관계는 깊고 명백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하므로써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고 청결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국외자들은 우리의 종교를 “마호멧주의자(마호멧교도)”라고 부른다. 무슬림들은 이런 말의 사용을 거부하며 이에 항의한다. 우리의 신앙이 마호멧주의로 유별(類別)되고, 우리가 마호멧주의자로 불리울 경우, 심히 그릇된 의미가 내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명칭은 이 종교가 일개 인간, 곧 무함맏의 이름을 따서 명명(命名)되고, 이슬람 역시 유태주의(유태교), 힌두주의(힌두교), 마르크스주의 등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주의”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잘못된 명칭이 내포하는 또 하나의 오류는 국외자들이 자기네가 마호멧주의자라고 부르는 무슬림들이 실례로 마치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함맏을 숭배하거나 믿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하나 더 보면, 마호멧주의자라는 말이 국외자들을 오도하여 그로 하여금 이 종교가 무함맏에 의해 창시되었고, 그 때문에 이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틀린 명칭에 내포된 의미는 모두 심히 잘못된 것이다. 고작해야 오해를 일으킬 뿐인 것이다. 이슬람은 또 하나의 주의(ism)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숭배하지도, 기독교인, 유태인, 힌두인, 마르크스주의자 등이 각자 자기네 지도자를 생각하듯 그를 생각하지도 아니다. 무슬림들은 하나님만을 숭배한다. 무함맏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모범적으로 생활할 임무를 하나님께 부여받은 일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인간에 대한 경건성과 완전성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로서 역사 속에 서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사람됨 그리고 미점과 미덕의 면에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경지의 산 증거다. 또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종교적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무함맏에 의해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그가 창시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슬람의 원 창시자는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슬람의 창시 년대는 아담시대까지 소급한다. 이슬람은 어떤 형태로든 태초부터 존재해 왔으며, 마지막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교의 올바른 명칭은 이슬람이며, 이를 신봉하는 자들이 무슬림인 것이다. 일반의 오해와는 달리 이슬람, 혹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그분의 법에 복종하는 것과 더불어, 결코 개인의 자유의 상실이나 운명론에의 굴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슬람의 올바른 의미와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은 그분을 가장 자비롭고 자애로우시며, 가장 사랑이 많고 인간의 안녕에 가장 관심이 많으신 분, 지혜로 충만하고 당신의 피조물을 보살펴 주는 분으로 평한다. 따라서 그분의 뜻은 자비롭고 선한 뜻이며, 그분이 규정하는 법은 무엇이나 인류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문화인들은 자기네 나라 법을 준수할 때, 건전한 시민으로, 그들이 속한 각 사회의 정직한 성원으로 간주된다.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이 법에 복종함으로써 자유를 잃게 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운명론자들이요, 무력한 자들이라고 단 한시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한 뜻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최선의 법인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건전하고 정직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는 한편, 타인의 권리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책임을 다하는 창조적인 고차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의에 순종한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가 줄어들거나, 박탈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차원의 자유가 풍부하게 주어진다. 이러한 순종은 정신을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진리로 가득 채운다. 영혼을 죄와 악에서 해방시켜 선과 청결로 그것을 자극한다. 자아를 허용과 탐욕에서, 질투와 긴장에서,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시킨다. 사이비신들과 저급한 욕망에서 해방시켜, 선과 미덕의 아름다운 지평을 인간 앞에 펼쳐 놓는다.





하나님의 선의에 순종하고 그분의 유익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평화와 조화를 보존하는 최선의 수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한편으로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 인간 사회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연의 제 구성요소들 간에 조화를 창출해 낸다. 이슬람에 의하면, 세상만물, 혹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현상은 하나님께서 정한 법칙에 지배된다. 그러므로 전 물질계가 이슬람의 상태에 있다는 것, 혹은 그것이 무슬림임을 뜻한다. 물질계는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갖지 않는다. 자의적으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즉 복종의 법인 창조주의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유독 인간에게만 지성과 선택 능력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능과 선택의 자질이 있기에, 하나님의 선의에 복종하고, 그분의 법에 순종하라고 권유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길을 택해야만,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게 필연적으로 복종하는 기타 자연의 모든 구성요소 사이에 조화를 구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의 길을 걷는다면, 정로(正路)에서 이탈하여 일관성을 잃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입법자의 노여움과 처벌을 받게 된다.





이슬람이 하나님의 선의에 순종하고, 그분의 유익한 법에 복종하는 것을 뜻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도들의 메시지의 정수를 이루는 것이므로, 무슬림이라면 무함맏 이전의 모든 예언자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예언자들과 이들의 추종자들 모두가 무슬림이었으며, 그들이 믿는 종교는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의 세계 종교인 이슬람이었다는 것을 믿는다.(꾸란, 2:128-140, 3:78-85, 17:42-44, 31:22, 42:13)





1972년 12월 4일자 Observer Dispatch(O.D)지에 실린 나의 성명을 여기에 전재하는 것이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성명은 이제까지 논의된 문제와 관련하여, 얼마나 많은 왜곡과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지를 지적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중복되고, 되풀이되는 점도 없지 않지만 쟁점이 극히 미묘하고 이슬람의 관점을 재론할 필요가 있어서인 만큼, 양해해 주기 바란다.





특종 뉴스 하나(O.D.11월 25일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미처 모르고 있던 대중에게 동정을, 많은 학교 교사와 종교계 인사에게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선의와 양식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자신의 도의적 책임을 외면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커스 일리아슨(Marcus Eliason)이 요르단의 이스라엘 점령지역에서 “모슬렘들”이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이브라힘으로 숭배하고 있다 ”고 보고해 왔다.





요즘 세상에, 우리가 사는 이 조그만 세계에서 무슬림들이 이브라힘을 숭배하고 있다는, 생생한 보도에 접하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더욱 믿어지지 않는 것은 이 뉴스가 짐작하건대 정통한 소식통에서 흘러나와 알 권리가 있는 대중에게 보고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서양인들은 무슬림들이 무함맏을 숭배한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무함맏의 종교가 마호멧교로 통하고 그 추종자들이 서양에서 마호멧교도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경위야 어떻든 무슬림들이 “일종의 신”인 알라를 숭배한다는 것이 서양인들에게 분명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들이 아브라함을 이브라힘으로 숭배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이나 그 외 어떤 인간도 숭배한 사실이 없다. 이들이 항상 믿어 오고 있는 바는, 무함맏은 그 보다 앞서왔던 수많은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간이며, 한 인간으로써 예언자 지위라고 하는 최고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인류에게는 최대의 찬사가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이 마지막 예언자이긴 하지만 유일한 예언자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낸 영원한 메시지를 보강하여 영원히 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메시지를 시대와 민족에 따라서 많은 예언자들에게 계시하였으니, 이들 예언자 가운데 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다윗, 모세, 예수 그리고 무함맏(이분들께, 평화가 깃들기를)이 포함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슬림들이 이들을 믿되, 그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우주적 소망과 세계주의적 정향(定向) 때문에 자기들을 마호멧교도라 부르고 자기들의 신앙을 마호멧교라 부르는 것을 불행한 오칭(誤稱)이라고 보아 이를 유감스러워 한다. 거기에 내포된 의미가 불쾌함에서다. 까닭 없이 그런 게 아니다. 무슬림들은 자기들이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이름을 따서 명명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초월적이고 영원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종교의 올바른 명칭은 이슬람이며, 그 신봉자는 무슬림이라고 불러야 타당하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본 이슬람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법에 복종함을 뜻한다. 꾸란은 하나님의 뜻을 선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그분의 법을 가장 이롭고 공정한 것을 규정한다. 따라서 이렇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슬람의 윤리적 상태에 있는 한 사람의 무슬림인 것이다. 꾸란이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믿을 만한 예언자들을 무슬림이라 칭하고, 이들의 종교를 오직 하나의 동일한 명칭 즉 이슬람으로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의미로서이다. 따라서 무슬림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무함맏의 추종자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나머지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추종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슬람에서 알라라는 말은 간단하나 지극히 단호하게, 온 세계의 창조자, 주중의 주, 왕 중의 왕이신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일상예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을 다음에 들어둔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슬람의 기본신조(基本信條) (up)


진실하고 충실한 무슬림들은 다음에 제시하는 주요 신조들을 믿는다.





1. 그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은 지고하고 영원한 분이며, 무한하고 강하신 분이며, 자비롭고 자애로운 분이요, 창조주이며, 부양자이시다. 이런 신념이 힘을 발휘하는데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그분만을 바랄 것이 요청된다.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그분의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 이러한 신념에 의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공포와 절망, 죄의식과 혼란에서 인간이 해방된다. 독자에게 앞에서 설명한 이슬람의 의미를 살펴 볼 것을 권한다.





2.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를 모두 믿되, 이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민족마다 하나님께서 보낸 경고자, 혹은 사도가 있었다. 이 사도들은 선을 가르친 위대한 교사였으며, 정의를 수호한 진정한 투사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택하여 인류를 가르치고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이들은 역사의 여러 시대를 통하여 보내졌으며, 민족마다 하나 이상의 사도가 있었다. 시대에 따라서는 한 민족에게 두 명 이상의 사도들을 동시에 보내시기도 하였다. 성꾸란은 이들 중 25명의 이름을 들고 받아들인다. 이들은 무함맏을 제외하고는 민족적, 지역적 사도로서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지, 그들의 종교는 근본적으로 같았으며, 이슬람으로 일컬어졌던 것이니, 이는 그것이 하나의 동일한 근원, 즉 하나님에게서 비롯하여, 하나님 정로(正路)로 인류를 인도한다는 한 가지의 동일한 목적에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사도들은 예외 없이, 결국에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었던 바,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내리고, 이들을 임명하여 어떤 과업을 수행하게 하셨다. 이들 중 무함맏은 최후의 사도로서 예언자 지위의 초석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다. 우리 멋대로 하는 생각이 아니요, 편의상의 신념도 아니다. 다른 모든 이슬람의 신념이 그렇듯이 그것은 근거 있는 논리적 진리인 것이다. 참고로 여기에 위대한 사도 몇 분 곧 노아와 아브라함, 이스마엘과 모세, 예수와 무함맏-이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이 있기를-제위의 이름을 언급해 둔다. 꾸란은 무슬림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한다 :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이삭, 야곱과 그 12지파에게 내려진 계시를 믿나이다. 그리고 모세와 예수에게 내려진 계시와, 주께서 당신의 모든 예언자들에게 내리신 계시를 믿나이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서로 차별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나이다.(꾸란, 2:136, 비교3:84, 4:163-165, 6:84-87)





3. 진실한 무슬림은 제 2조의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경전과 계시를 믿는다.





이들은 인도의 불빛으로서 사도들은 이를 통하여 제각기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의 정로(正路)를 보였다. 꾸란은 특히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예수의 경전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이 계시되기 오래 전에 이런 경전과 계시의 일부가 소실되거나, 왜곡되었으며 또 일부는 망각되고 등한시되거나, 혹은 감추어져 버렸다. 현존하는 하나님의 경전으로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꾸란뿐이다. 무슬림들은 꾸란 이전의 경전과 계시를 믿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그 완전한 원본이 어디 있는가? 사해(死海)밑에 아직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앞으로 두루마리들이 더 발견될 지도 모른다. 또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 고고학자들이 성지에서 발굴을 계속하여 찾아낸 것들을 전부,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면 이에 대한 정보를 더 입수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슬림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다. 완전하고 믿을 수 있는 꾸란이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소실된 부분이 없으며, 더 첨가될리도 없다. 그 신빙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신중한 학자나 사상가 가운데 그 누구도 그것이 진본(眞本)이라는데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꾸란의 이런 특성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인 바, 하나님께서는 꾸란을 계시하시어, 친히 책임을 지시고, 그 첨삭과 왜곡을 철저하게 막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꾸란은 여타의 모든 경전의 판단 기준으로서 무슬림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꾸란과 일치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되지만, 꾸란과 어긋나는 것은 다 배제되거나 보류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





진실로 우리가 꾸란을 보내었노니, 또 정녕코 이를 보존하리라. (꾸란, 15:9 비교 2:75-79, 5:13-14,41,45, 6:91, 41:43)





4.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믿는다.이들은 순수한, 빛나는 영적 존재들이며, 본질적으로 먹고 마시거나 자야 할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육체적 욕망이나 물질적 욕구가 없다. 이들은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이런 천사들은 많이 있으며 천사마다 어떤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육안으로 천사를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실존이 필연적으로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눈으로 볼 수 없고 감각되지 않는 것이 많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의 존재를 믿고 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장소들이 있는가 하면, 기체나 에테르처럼 육안으로 보거나 냄새를 맡거나, 만져 보거나, 맛을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를 믿는 것은 지식이나 진리를 오로지 감각적 지식이나 감각적 인식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슬람의 원칙에서 연원한다. (꾸란, 16:49-50, 21:9-20, 제 2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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