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항

Dr. A.B Philips





번역: 카람 김은수


 머리말





인간 창조의 목적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고민해본 주제다. 가끔씩은 혼자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왜 내가 존재하는 거지?” “어떤 목적으로 내가 지구상에 있는 걸까?”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몸과 지구의 오묘한 시스템을 바라볼 때면 그 어떤 ‘궁극의 존재’가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였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디자인이 있으면 디자이너가 있기 마련이다. 해변에 찍힌 발자국을 볼 때면 우리는 누군가가 이전에 그 곳을 걸어갔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파도가 모래에 파고들어 우연에 의해 사람의 발자국과 똑같은 무늬를 남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결론짓는 사람은 없다. 이성을 지닌 인간이 자연스레 목적을 동반한 행동을 취하듯이 ‘지성을 지닌 궁극의 존재’ 역시 반드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해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현세의 삶을 잘 이해하고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득이 되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리는 항상 존재해 왔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물질은 영원하며 인간은 우연에 의해 조합된 물질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 그들에 따르면 존재에는 목적이 없다. 그러나 여러 시대에 걸친 대다수 사람들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한 ‘궁극의 존재’가 있음을 확신해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창조자’를 알고 인간 창조의 목적을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답변





“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하기 전에 먼저 그 질문이 어떤 관점에서 제기되었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질문은 “어떠한 동기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는가?” 라고 풀이될 수 있는 반면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떠한 목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고 해석할 수 있다. 두 관점 모두 “왜 내가 존재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반영하고 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성서를 통해 두 질문에 대해 답변해보려고 한다. 사실 이 주제는 인간의 추측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인간의 어림짐작은 이 문제에 관한 그 어떤 진리도 도출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두뇌 혹은 그보다 고차원적인 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추론해내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러 시대를 걸쳐 많은 철학가들이 위 질문에 관해 고민하고 나름대로의 답변들을 만들어냈지만, 그 답변들 모두 증명될 수 없는 가정에 기초한 것들이다. 심지어 몇몇 철학가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길,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은 허영에 불과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가 플라톤(428-348 BC)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오감을 통해 알게 되는 매일의 변화무쌍한 세계는 일차적 실제가 아니며 다만 참된 세계에서 비롯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1] 또 다른 이들은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인간 창조에는 아예 목적 자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존재함은 단순한 우연의 결과물이다. 생명이 무생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그 생명이란 한낱 우연에 다름 아니므로 거기에 목적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인류의 ‘친척’인 원숭이들도 그들 존재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데 굳이 우리 인간이 그 문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왜 창조되었는지 잠시 동안 고민하다 이내 생각을 접어버리지만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아는 것은 실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위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주위의 여타 동물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먹고 마시고 교미하는 동물의 기본 욕구와 성욕이 인간 존재의 근본 목적이 되고 인간의 노력은 이 한정된 영역에만 집중된다. 물질적 만족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잡을 때 인간의 존재는 동물보다 더 낮은 차원으로 퇴화한다.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할 때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그릇된 방향으로 사용하게 된다. 타락한 인간의 지성은 마약과 무기를 만들어내는 데 쓰이고 인간은 간통, 포르노, 동성애, 점치기, 자살 등에 몰입한다.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은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나머지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고 영원한 행복이 있는 내세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변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다.





 위의 답변을 찾기 위해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인 다른 이들에게서 해답을 구해보지만, 깔끔하고 정확한 답변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서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인간 스스로 정확한 답변을 찾을 수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분의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를 내리셨다. 모든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는가?”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준 것이다.





유대-기독교 경전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성경을 유심히 읽어본다면 분명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구약은 가장 중요한 문제인 인간의 창조보다는 율법과 고대인의 역사, 유대인 등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2] 구약의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육일 만에 세상과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고 칠일 째 되는 날 그분의 일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셨다’.[3]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벌을 받고, 그들의 아들 가인은 형제 아벨을 죽이고 놋의 땅으로 가서 살게 된다. 그러한 나머지 하나님은 사람을 만든 것에 대해 ‘후회’하고 만다![4] 왜 성경에서는 창조의 이유가 오해의 여지 없는 명확한 용어로 설명되어 있지 않는가? 왜 저 많은 상징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독자가 그 뜻을 추측하게끔 만드는가? 예를 들어, 구약의 창세기 6:1-2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유대인의 분파와 그들을 따르는 기독교의 많은 분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설명을 붙이고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전 예언자들이 인간 창조의 목적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들 이후의 몇몇 추종자들은 사악한 무리들의 압력에 굴복한 나머지 성서의 내용을 바꾸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호해졌고 대부분의 계시는 상징적인 표현 속에 묻혀버렸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유대인에게 보내셨을 때, 예수는 성전에서 판을 벌이던 장사치들을 내쫓은 후[5] 유대인 랍비들의, 의식에 치중한 율법 해석을 비판하였다.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확증하였고 그 율법을 다시 되살렸다. 그는 제자들에게 삶의 목적을 가르쳐주었고, 이 세상을 떠나가 전까지 목적에 충실한 삶이 어떤 것인지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을 떠나자 소위 제자라고 자칭하는 몇몇 이들은 그의 메시지를 왜곡하였다. 이전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그랬듯이, 예수가 가져왔던 명백한 메시지 역시 모호해졌다. 상징주의가 도입되었고 -특히 신약의 요한 계시록이 그러하다- 예수에게 계시되었던 복음서는 사라졌다. 4세기 경의 주교 아타나시오스는 잃어버린 예수의 복음서를 대체하기 위해 인간의 손으로 적힌 네 권의 복음서를 채택하였다.[6] 바울이 쓴 편지로 구성된 23권의 책과 기타 책들이 신약에 포함되었고 그 분량은 네 권의 복음서를 넘어선다.[7] 결과적으로, 신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8] 특정 분파가 만들어 낸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방법이 아니고는 해답을 구할 수가 없다. 복음서들은 각 분파의 신조에 따라 제각각 해석되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무엇이 정확한 해석인지 알지 못한 채 헤매게 된다.





하나님의 육신화(肉身化)





인간 창조의 목적에 관해 기독교 분파들이 한 목소리로 동의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로부터 벗어난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원죄라는 것은 너무나 막대한 것이라 인간이 아무리 속죄하고 참회해도 그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므로 죄를 지은 인간은 그분 앞에 설 수 없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 있을 때만이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다. 사람이 지어낸 이 우화는 –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기독교에서의 인간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희생’을 인지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받드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같은 맥락으로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9]





그러나, 만약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고 영원한 삶을 누리는 전제 조건이라면, 왜 모든 예언자들은 이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자손이 있던 그 시절에 인간으로 변하여, 모든 인류에게 존재의 목적을 충족시키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주지 않으셨는가? 아니면 예수 시절과 예수 이전의 시절에는 존재의 목적이 서로 달랐단 말인가? 예수에 관해 들어보지 못한 현시대의 사람들은, 그렇다면 창조의 목적을 실현할 기회가 아예 없다는 말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창조의 목적이란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도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모든 것이 신이다





힌두 경전을 보면 신은 여럿이며, 신들은 사람의 육체를 가진다. 또한 신은 인격을 가지며 모든 것이 브라만(Brahman), 즉 신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체의 자아(atmari)가 브라만이라는 신조에도 불구하고, 억압적인 카스트 제도가 규정하길, 브라만 계급(승려 계급)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우월한 영혼을 가진다. 베다(Veda[10])를 가르치는 그들은 종교적 순결함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적 특권을 누릴 권리를 지닌다. 반면에 수드라 계급에는 종교적인 지위가 없으며, 그들의 본분이란 다른 세 계급층과 수 천명에 이르는 그들의 하부 계급층을 ‘군말 없이 시중드는’[11] 일이다. 힌두교의 일원론 철학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신성을 실현하기 위함이며, -윤회의 고리로부터 해방(mokshd)되기 위한 길(marga)를 따름으로써- 인간 영혼(atman)이 궁극적 실체인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Bhakti의 길[12]을 따르는 자의 삶의 목적은 신을 사랑하는 것인데, 신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인간과의 관계로부터 기쁨을 얻기 위해서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마치 “아버지가 자식들과의 관계로부터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Srimad Bhagwatam). 일반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 현세 삶의 목적은 사회적, 종교적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자신이 속한 카스트 계급의 여러 전통적 규칙들을 잘 따르는 것(karma의 길)이다.[13]





베다에 언급된 대부분의 종교 의식(불의 희생 의식에 관해 집중하고 있다)은 다른 책에 기록된 힌두교의 교리와 의식에 의해 빛을 바랬지만 베다가 가지는 권위와 신성함은 사실상 모든 힌두교의 분파와 전통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베다는 총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Rigveda(‘지혜의 구절’)이다. 이 책에서는 아주 혼란스런 용어들로 신을 설명하고 있다. Rigveda에 투영된 종교는 다신교로서, 하늘과 대기에 관련된 신들을 달래는 방법에 집중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들을 꼽아보면 ‘인드라’(하늘과 비의 신), ‘바루나’(우주 질서의 수호자), ‘아그니’(희생제의 불), ‘수르야’(태양) 등이 있다. 후기 베다를 보면, 초기 베다에서의 신들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다신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 즉 프라자파티(Prajapati, 창조물의 주)를 위한 희생제적 범신론으로 대체된다. 우파니샤드(Upanishads, 우주 질서에 관한 비전(秘傳))에서는 프라자파티의 개념이 궁극적 실체이자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과 혼합되어, 그 결과 신화가 추상 철학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겪는다.[14] 만약 올바른 길로 인도되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이 책들 뿐이라면 우리 인간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것이다 : 신은 자기 자신을 숨기고 인간 창조의 목적도 숨겼다!





하나님은 혼란스런 책의 저자가 아니며 인간에게 어려움을 바라지도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1,400년 전 인류에게 마지막 계시를 내릴 때, 그 후에 올 모든 세대를 위해 계시서의 완벽한 보전을 약속하였다. 그 계시서, 즉 꾸란(코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의 목적을 알려주셨고 그분의 마지막 예언자를 통해 인간이 이해 가능한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상세히 설명해주셨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이 계시서와 예언자의 가르침을 기초로 “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놓고자 한다.


 하나님은 왜 만물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질문의 이유는, 실제로 인류는 그 창조의 위대함에 있어서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가피르 장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





 “단연코 하늘들과 땅의 창조가 인간의 창조보다 더 위대하나 대부분의 인간은 알지 못하노라.” [꾸란, 40:57]





인간의 육체는 그가 존재하고 있는 우주보다 훨씬 덜 복잡하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극히 적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신이 가장 우월한 피조물인 것이 확실하고, 우주를 여행하고 기술과 지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는 바로 인간 자신이라는 거만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간이 이룬 대부분의 위대한 발견은 인간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닌 그를 둘러싼 여러 환경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보다는 물질 세계에 더 집중하려 한다. 하나님은 위 꾸란 구절을 통해 인간을 그의 실제 위치로 되돌려 놓으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행위로부터 비롯된 존재들의 조그마한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였는지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인 ‘하나님은 왜 창조하시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창조자





근본적으로 창조는 ‘창조자’라는 신성(神性)의 결과물이다. 창조자가 창조하지 않는다면 창조자라는 용어 자체부터가 모순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을 필요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초월하시는 분이다. 피조물이야말로 그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위대한 저자의 글 솜씨가 그의 글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듯이, 창조는 신성의 완벽함을 확연히 나타낸다. 진실된 의미에서의 창조는 하나님 한분에게서만 발견된다. 인간은 자신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행하는 창조는 진정한 창조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창조된 것들을 조합할 뿐이다. 우리가 식탁을 만들 때 쓰이는 목재는 나무로부터 나오고 목재 조립에 필요한 나사못은 쇠로부터 만들어지며 그 쇠는 돌에서 추출된다. 나무와 돌은 인간이 만들지 않았다. 사실 인간의 창조행위 모두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기본 구성요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그가 ‘창조하는’ 미술 작품은 그가 관찰한 것에 기초한다. 시각에 의해 인지되지 않은 것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화가의 생각 모두는 이미 창조된 것들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이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현대와 고대의 몇몇 철학가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무로부터 유를 창조할 수 있느냐면서, 창조된 세계와 그 구성물 모두는 원래 하나님의 일부라고 주장한다.[15] 즉,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우주를 만드셨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수정하는 방법으로만 ‘창조’할 수 있는 인간과 근원적 창조자인 하나님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은 이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종류의 비교를 부정하신다. 이러한 비교는 그분께 인간의 제한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앗-슈라 장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





“그분과 비슷한 것은 없노라. 그분은 모든 것을 들으시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시라.” [꾸란, 42:11]





따라서 창조 행위는 창조자라는 신성의 결과물이다.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다양한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창조자로 언급하시면서 모든 것은 그분에게 귀속된다는 사실을 인간에게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모든 것의 의탁의 대상이노라.” [꾸란, 39:6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과 너희들의 행위를 창조하셨도다.” [꾸란, 37:96]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쁜 것을 피하고자 할 때나 좋은 것을 얻고자 할 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문이나 부적, 별자리, 손금 등을 통해 악운을 막고 길운을 불러들이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무지의 소치다. 따라서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알-팔라끄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것을 피하고자 할 때 하나님 당신께 요청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말하라 : 새벽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라. 그분께서 창조하신 것의 사악함으로부터(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라). [꾸란, 113:1,2]





알라(Allaah),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악하지 않으시다. 그분은 선(善)이시다. 그분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였고 그 안에는 그분께서 주신 능력에 의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행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 그러나 나쁜 것과 좋은 것 모두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을 때만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의 존재에게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재앙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이 있을 때만 발생하노라.” [꾸란, 64:11]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는 이 개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기억하라. 모든 사람이 모여서 너를 도우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너에게 득이 되는 것으로 이전에 기록하신 것뿐이라. 모든 사람이 모여서 너를 해치려도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너에게 해가 되는 것으로 이전에 기록하신 것뿐이라.”[16]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는 분





인간 창조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용서, 자비, 친절도 포함된다. 인간은 선하고 순수하게 창조되었고 타고난 인지력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에 욕망을 창조하심과 동시에 그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그 능력을 적절히 활용하면 하나님의 법을 잘 준수할 수 있으나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 그는 맹목적으로 욕망만을 쫓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이 그분에게 불복할 것이란 사실도 잘 알고 계셨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아담부터 시작하여 인간들에게 참회하는 법과 죄로부터 자신을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아담과 이브는 전 인류가 따라야 할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잊었고 사탄이 그들의 욕망을 교묘히 이용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이내 용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셨다. 인간의 불복종과 하나님께 대한 참회는, 널리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 이에 관해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그대들이 죄를 전혀 짓는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들 대신 죄를 짓는 다른 사람들을 두시어 그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도록 하실 것이라. 그 후 그분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17]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114장 모두, 한 장을 제외하고,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이 문구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관용이 강조되며 이를 통해 인간은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게 된다. 저지른 죄가 얼마나 막중한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가 있다면 그분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사도(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 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시작하실 때 그분의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시어 그 내용이 실현되도록 하셨도다 : ‘나의 자비는 나의 분노를 능가하노라.’ ”[18]





그의 또 다른 말씀은





”하나님께는 그분의 자비를 백 개로 나누시어 그 중 하나를 인류와 진과 동물들에게 내려보내셨노라. 그 하나의 자비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니 동물들조차 새끼들을 사랑으로 대하더라.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아흔 아홉 개의 자비를, 심판의 날 그분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들을 위해 보관해 두고 계시노라.”[19]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그분께서는 인류를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천사와 같이 창조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니, 그분께서는 이미 천사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도록 창조되었고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때, 자비와 관용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궁극의 정의로움





인간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속성인 궁극의 정의로움과 공평하심은 명백히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분이 가지신 무한의 지식으로써- 곧바로 몇몇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시고 나머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실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그가 현세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기회를 부여 받을 것인지, 믿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불신자로 죽을 것인지를 모두 다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천국을 위해 창조되었고 다른 이는 지옥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도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아내 아이샤가 전하는 그의 말씀을 인용해보면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창조하시고 그 후 그곳의 거주자를 창조하셨음을 알지 못하는가?”[20]





만약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자들을 곧바로 천국으로 들여보내셨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결정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의 거주자는 축복받은 영원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지옥에 들어가지 않음에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지옥으로 들어간 자들은 분명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들이 만약 지구에서 삶을 살았을 경우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기에 이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지옥의 거주자들이 강력히 주장하는 바는, 그들이 만약 지구에서 삶을 살았다면 분명 하나님을 믿고 선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지구에서 직접 살아볼 수 있도록 하시고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 결과 지옥에 들어가는 모든 이는, 지옥을 선택한 자는 다름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 내려졌던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증거와 인도를 부정했던 그들의 죄 역시 수긍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의의 여지가 없는 공정한 판결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한번 현세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는데, 꾸란의 앗-싸즈다 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대가 죄지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 머리를 수그리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그들이 말하길) “우리의 주님이시여! 저희는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되돌려 주십시오. 선한 행동을 하겠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이제) 확실히 믿는 자들입니다.”” [꾸란, 32:12]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한번 현세로 돌려보내더라도 그들은 지옥에서 본 것을 잊은 채 또다시 악한 삶을 살고 따라서 예전과 변함없이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 사실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알-안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그들이 되돌려 보내진대도 그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것으로 또다시 다가갈 것이니 진실로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라.” [꾸란, 6:28]





하나님의 사랑





믿는 자든 불신자든 생명체로 존재하여, 짧은 시간일지라도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악이 아닌 선을 선택한 자를 위해 만들어진 천국, 그 천국의 존재를 인지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지막 성서를 통해 말씀하시길,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자(5:13), 공정한 자(5:42),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9:4), 인내하는 자(3:146), 그분께 의탁하는 자(3:159), 그분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을 정화하는 자(2:222) 등이다. 또한 그분께서는 인간을 위해 어떤 것이 선이고, 공정함이며 경외심인지 그분의 성서와 예언자를 통하여 정의하여 주셨다. 따라서 예언자들을 따르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사랑스러운 자들이다. 알루 이므란 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에게 명령하시길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따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사랑하실 것이며 너희들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라.” [꾸란, 3:31]





예언자들을 따르는 것은 비단 하나님께서 의무로 정하신 행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신앙 행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와 축복을 주심에 있어 받을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널리 베푸신다는 사실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특히,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바라볼 때면 더욱 그러하다. 인간 역사의 시작에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의 참회를 받아들여주셨고 그들의 예는 그들 이후의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되었다. 그 죄가 얼마나 막중하든 상관없이 참회의 문은 심판의 그날까지 늘 열려있다. 아나스가 전하는 하나님의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오 아담의 자손이여, 네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요청하는 한 나는 너를 용서해줄 것이니 그것은 나에게 쉬운 일이라. 오 아담의 자손이여, 너의 죄가 하늘의 구름에까지 미칠 정도라도 나는 너를 용서해줄 것이라. 오 아담의 자손이여, 네가 나에게로 왔을 때 너의 죄가 지구의 크기만큼이더라도, 네가 나와 대등한 존재를 두지 않았다면, 나는 네가 지은 죄의 크기만큼의 용서를 줄 것이라.”[21]





하나님의 은총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그의 선행 하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에 관해 마지막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가 말씀하시길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라. 그의 선행 하나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 그의 교우들이 묻길 “오 하나님의 사도시여, 당신도 그러합니까?” 그가 대답하길 “나 역시 마찬가지라, 하나님께서 나를 자비와 은총으로 감싸주지 않는 한 (나 역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노라).[22]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사랑스러운 행위는, 비록 그것이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꾸준하게 실천하는 행위임을 알라.“[23]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기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분의 은총은 수혜자의 올바른 믿음과 선행에 근거하여 주어진다. 알루 이므란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선을 행한 자는 그것과 비슷한 것의 열 배를 받을 것이며, 악을 행한 자 그가 받을 것은 오직 그것과 비슷한 것뿐이니 그들은 부당하게 다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꾸란 6:160]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엄격하게 심판하신다면 그 누구도 그의 선행이 악행보다 더 무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행의 가치를 증가시키고 악행의 가치는 있는 그대로 기록하시니 그로 인해 그분의 은총은 더욱 드러나게 된다. 진정으로 믿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행위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행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와 그가 저지르는 잘못, 그가 행하는 선행 모두는, 하나님의 속성인 자비와 용서, 정의로움, 은혜 등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속성을 드러냄에 있어서 왜 이러한 방식을 선택하셨는지 인간이 따져 물을 수 없다. 다만 이 방식이 가장 좋은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는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묘사하시길 가장 현명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사실 그것만 알 뿐이다.





“그들이 지식으로써 인지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한정되노라.” [꾸란 2:255]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두어선 안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고 그 이유를 인간에게 알려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질문할 수 없다. 그러한 질문은 끝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 심판의 날 왜 그런 행동을 했고 왜 그런 의도를 가졌는지 질문 받는 이는 우리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안비야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행위에 관해 질문 받지 아니하시며 그들이야말로 질문을 받을 것이라” [꾸란 21:23]





같은 맥락에서 이븐 압바스가 전하는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가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깊이 생각하되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24]





하나님의 실체에 관해 숙고하는 것은 무한(無限)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이다. 한정된 우주와 그 안의 은하계와 별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하물며 창조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 들 때 우리는 더욱 난해함을 느낄 것이다.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 경고하길, 사탄의 힘이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의문을 일으켜, 하나님에 대해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도록 유혹할 것이라고 하였다.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는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사탄이 그대들에게 와서는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라 : 이것은 누가 창조했는가? 저것은 누가 창조했는가? – 결국 그가 묻길 : 너의 주님은 누가 창조했는가? 이런 경우에 [‘하나님과 그분의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을 확증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25]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하라.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을] 피하라.”[26]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이 풀어쓸 수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은 위 질문에 대해 그 어떤 애매함도 없이 아주 명쾌히 답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의 첫 순간에 인간에게 알려주시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직감을 타고 난다. 알-아으라프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너희들의 주님께서는 아담의 자손들로부터, 그들의 등으로부터 그들의 자손들을 꺼내신 후 그들 자신에게 증언토록 하셨노라 : “내가 너희들의 주님이지 않은가?” 그들이 말하길 “그렇습니다! 우리는 증언합니다!” 그렇게 하여 심판의 날 너희들이 “우리는 이것에 대해 몰랐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함이라. 또는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를 둔 것은 이전의 우리 조상들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의 후손일 뿐입니다. 거짓(하나님 이외의 존재를 숭배하는 행위)을 일삼는 자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저희까지 파괴하시려는 것입니까?”라고 너희들이 말하지 않도록 함이라. [꾸란, 7:172-3]





예언자(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길)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이슬람력 12월 9일[27], ‘나으만’이라는 장소에서 아담으로부터 서약을 받으셨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인간을 뽑아내시니, 마지막 그날까지 태어날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줄지어 섰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도 서약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하나 하나를 일대일로 대면하시어, 그분이야말로 그들의 주님임을 증언토록 하셨다.[28]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응답해야 한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이와 같은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의 목적에 대해 앗-다리야트 장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다.





“내가 진[29]과 인간을 창조한 것은 오직 그들이 나를 경배토록 하기 위함이라,” [꾸란, 51:56]





이와 같이, 인간이 창조된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경배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자신께서 무언가 필요해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인류 모두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그분의 영광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은 완벽하시다. 그분께서는 어떠한 필요도 없으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반면 모든 피조물은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경배의 의미





왜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배’라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영어의 worship(경배)은 ‘명예’의 뜻을 가진 고대 영어 weorthscipe라는 단어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worship, 즉 경배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헌신적 행위’로 정의된다.[30] 이 의미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함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분을 찬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안-나쓰르 장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





“그러하니, 그대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라.”[꾸란, 110:3]





하나님을 찬미함으로써 인간은, 선천적으로 창조주를 찬미하는 인간 이외의 존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꾸란의 여러 장들을 통하여 이와 같은 현상에 관해 언급하고 계신다. 예를 들어, 알-이스라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





“일곱 개의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지 않는 것은 없노라.[31] 그러나 너희들은 그들의 찬미를 이해하지 못하노라.” [꾸란 17:44]





반면,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언어, 즉 아랍어로 경배는 ‘이바다’라고 하며, 이 단어는 ‘종’의 의미를 지닌 명사 ‘압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종은 그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행하는 자를 말한다. 따라서 마지막 성서인 꾸란에 따르면, 경배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내신 모든 예언자들의 한결 같은 핵심 메세지이다. 예를 들어, 예언자 예수는 위와 같은 뜻으로서의 경배를 강조하여 말하길 마태복음서 7:21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하나님의 뜻(의지)’은 예언자들이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가르쳐준 하나님의 법률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찬미함에 있어 그분께서 알려주신 방법을 따른다면 찬미 행위 역시 경배가 된다.





경배의 필요성





인간은 왜 하나님이 계시한 법률에 따라 그분을 경배하고 찬미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률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현세와 내세에서 성공하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천국에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의 법률을 어긴 결과 천국에서 추방되었다. 인간이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법률을 잘 따르는 것이다.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메시아 예수가 말하길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것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 그런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고자 하거든, 계명들을 지켜라."[32] 또한 마태복음서 5:19에서 예수는 율법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폐지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법률은 삶의 모든 분야에 있어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 법률은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며, 인간 삶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시스템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득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하나님의 법률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 인간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행위와 실체를 명령하고 금한다. 하나님의 법률을 잘 준수하여 그분을 경배함으로써 인간은 올바른 삶을 살고 개개인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 기억하기





하나님의 법률에 담겨진 모든 종류의 경배 행위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람은 가끔씩 가장 중요한 일조차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온 정신을 쏟아 부은 나머지 정신적 풍요로움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진정으로 믿는 자에게 있어 규칙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한 시(時)테크의 역할을 한다. 예배는 하루 하루의 정신적 필요와 물질적 필요를 서로 잘 엮어준다. 먹고 일하고 잠자는 것이 하나님과의 연결고리를 새롭게 다지는 것과 조화롭게 연결된다.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규칙적인 예배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따하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진실로 나는 하나님이니 나 이외에는 경배 받을 존재가 없노라. 그러니 나를 경배하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나를 기억하라” [꾸란 20:14]





단식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바까라 장을 통해 말씀하시길





“오 믿는 자들이여! 그대들 이전의 자들에게 의무로 규정되었던 것처럼 그대들에게도 단식이 의무사항으로 규정되었노라. 이는 그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위함이라.” [꾸란 2:183]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는 믿는 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장된다. 하나님의 법률에 따르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 중용이 덕목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만큼은 예외이다. 실제로 하나님을 ‘너무 많이’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아흐잡 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가능한 한 많이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장하신다.





“오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을 자주 많이 기억하라.” [꾸란 33:41]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가 강조되는 이유는 보통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악의 힘이 가장 자유로이 활동하는 시간은 하나님이 잊혀졌을 때이다. 따라서 사탄의 힘은 사람들의 마음에 부적절한 생각과 욕망을 채워 넣어 하나님을 잊게 하고자 노력한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사람들은 부정(不正)한 것들에 거리낌없이 다가서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무자달라 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사탄이 그들 마음을 장악하니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더라. 그들은 사탄의 무리라. 진실로 사탄의 무리 그들이야말로 손실자라.” [꾸란 5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