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예수 그리스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다른 어떤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이슬람을 종교로 받아들였습니다
“무함마드여, 말씀하시오: ‘성서의 사람들아! 우리 사이의 공통된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오직 알라만을 숭배하고, 그분과 어떤 것도 동반하지 말자…’”
(꾸란 3장 64절)
작성자:
무함마드 알사예드 무함마드
『왜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책에서 발췌됨
[Why Believe in the Prophet of Islam, Muhammad (peace be upon him)?]
우리가 지금 논의 중인 제목에 따라: “저는 예수 그리스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다른 어떤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이슬람을 종교로 받아들였습니다” 는 이 말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됩니다:
왜 이슬람은 ‘획득’이고 ‘승리’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나 어떤 예언자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알라)과 신앙 문제를 올바르게 접근하려면 개인적인 욕망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히 주신 사유의 은혜를 활용하여, 창조주시며 지고지순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개인이 주님 앞에서 책임지게 될 신념의 문제에 대해, 건전한 이성이 동의하는 바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걸맞은 올바른 신념을 추구하는 선천적인 인간 본성에 따라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한 개인은 이슬람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증거들과, 이 종교를 전한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메시지를 입증하는 명확한 논거들을 목격할 때, 이슬람을 얻게 된 기쁨과 축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그 진실을 알아보게 해주시고,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은총으로 인도해주신 **알라(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러한 증거와 논리적 입증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민족 사이에서 뛰어난 도덕성과 고결한 성품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하나님(알라)께서 그를 예언자로 선택하신 데에는 지혜가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의 대표적인 자질 중 하나는 **진실함(정직)**과 **신뢰성(믿을 수 있음)**입니다.
그가 이 두 가지 미덕으로 불릴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가 진실함을 버리고 거짓말을 퍼뜨린다거나, 더 나아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고 예언자라는 허위 주장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둘째:
그의 부르심(초청, 다와)은 순수한 인간 본성과 건전한 이성에 부합합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됩니다:
👉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것, 그리고 신성에서의 유일성, 그분의 위엄, 그분 능력의 광대함을 인정할 것.
👉 사람이든, 돌이든, 동물이든, 나무이든 — 하나님 외의 어떤 대상에게도 기도나 숭배를 하지 않을 것.
👉 하나님 외의 어떤 존재도 두려워하거나 그에게 희망을 두지 않을 것
마치 한 사람이 이렇게 깊이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나를 창조했고, 이 모든 피조물을 존재하게 했는가?”
그에 대한 논리적인 대답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존재하게 한 분은 분명히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무(無)에서 창조하고 존재하게 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무’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계속한다면: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는가?” 그리고 가정상 그에 대한 대답이 이렇게 나온다면: “그 역시 위대하고 강력한 또 다른 신에 의해 창조되었음이 틀림없다” — 그 사람은 같은 질문을 무한히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논리적이고 확정적인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조주이신 그 하나님은 창조되거나 시작된 분이 아니며, 그분은 절대적인 창조의 권능을 가지고 무에서 존재를 창조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참된 신이시며, 유일하신 분이며, 오직 그분만이 예배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잠을 자고, 소변을 보고, 배설하는 피조물인 인간 안에 하나님이 깃든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걸맞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나 다른 동물들(예: 소를 숭배하는 경우 등)**에 하나님이 깃들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부적절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의 최종 운명은 죽음과 부패한 사체로의 변형이기 때문입니다.
📚 참조: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조용한 대화 (A Quiet Dialogue between a Hindu and a Muslim)』
👉 하나님을 조각상이나 어떤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삼가라는 부르심 —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거나 욕망에 따라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어떤 이미지보다도 훨씬 더 위대하고 고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참조: 『불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평화로운 대화 (A Peaceful Dialogue Between a Buddhist and a Muslim)』
👉 하나님이 자녀를 낳아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그분을 벗어나게 하려는 부르심 —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누구에게서도 태어나지 않으셨고, 그러므로 누구를 낳을 필요도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녀를 낳는다고 가정한다면, 그분이 두 명, 세 명 혹은 그 이상을 자녀로 삼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생각은 결국 그들 모두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결국 기도와 숭배가 오직 한 분 하나님이 아닌 여러 존재에게 나뉘게 되는 다신주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 타 종교에서 하나님께 부여된 불완전하고 부적절한 속성들로부터 하나님을 정화하라는 부르심 — 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됩니다:
•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고 슬퍼하신 존재로 묘사하는 것 — 예를 들어 창세기 6장 6절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등장하며, [기독교 성경은 유대교 경전을 '구약성경'으로 포함하고 있음].
그러나 후회와 슬픔은 어떤 행위의 결과를 미리 알지 못해 실수를 했을 때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전지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이러한 감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천지창조 후에 ‘쉬셨다’고 묘사하는 것 — 출애굽기 31장 17절에 언급되어 있으며, 영어 번역에는 **‘에너지를 회복하셨다’**는 표현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휴식과 에너지 회복은 피로와 노력에서 오는 것이며,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는 속성입니다.
📚 참조: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의 비교와 그 중에서의 선택 (A Comparison Between Islam, Christianity, Judaism, and The Choice Between Them)』
👉 하나님께 인종차별이라는 속성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라는 부르심 —
유대교에서 주장하듯이 하나님이 특정 개인이나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거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인종차별을 혐오하고 거부하는 성향을 부여하셨기에, 그러한 속성을 그 본성을 부여하신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위대함, 완전함, 아름다우신 속성들을 믿으라는 부르심 —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 완전한 지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계시, 예언자들, 그리고 천사들을 믿으라는 부르심 —
이는 기계와 인간을 비교하는 비유를 통해 설명됩니다:
복잡한 부품으로 이루어진 기계조차 고장 없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제작자가 제공한 설명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한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인간에게도 삶의 방식과 행동을 올바르게 안내할 설명서, 즉 하나님의 계시와 가르침이 담긴 책이 필요합니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를 전달하도록 선택하신 예언자들을 통해, 그 계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천사를 통해 전달됩니다.
👉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지위와 존엄을 높이고, 타 종교들에서 그들에게 부여된 부적절한 행동들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하라는 부르심 —
그러한 행동들은 선량한 사람조차도 할 수 없는 행위들이며, 예언자라면 더더욱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예를 들어:
•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선지자 아론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숭배하고, 그것을 위한 신전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것을 숭배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합니다 (출애굽기 32장).
• 또한, 선지자 롯이 술에 취해 두 딸과 근친상간을 하여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19장).
하나님께서 자신과 피조물 사이에 사절로 선택하신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비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선택을 비난하는 것이며, 그분을 마치 감춰진 것을 알지 못하고 지혜가 부족한 분으로 묘사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류 모두에게 등불처럼 길을 인도하는 모범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만약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그러한 부도덕한 행위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과연 그러한 행위들로부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오히려 그러한 죄악을 정당화하고 확산시키는 구실이 될 수 있습니다.
👉 심판의 날을 믿으라는 부르심 — 그날에는 모든 피조물이 죽음 후에 부활하며, 각자 자신의 행위에 따라 책임을 지게 됩니다.
믿음과 선행을 행한 자에겐 영원한 행복의 삶이라는 위대한 보상이 주어지며, 불신과 악을 행한 자에겐 끔찍한 고통의 삶이라는 혹독한 처벌이 따릅니다.
👉 올바른 법률과 고귀한 가르침을 믿으라는 부르심, 그리고 이전 종교들에서 나타난 신념의 왜곡들을 바로잡는 부르심 — 예시:
- 여성 문제: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와(아담의 아내, 평화가 있기를)**가
아담을 유혹하여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하며 (창세기 3:12), 그 결과 하나님이 하와와 그 자손에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벌로 내리셨다고 합니다 (창세기 3:16).
• 하지만 꾸란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가르칩니다 — 아담의 불복종은 악마의 유혹 때문이지 아내 때문이 아님을 밝힙니다 ([알아아라프 7:19–22], [타하 20:120–122]) 이를 통해 이전 종교들이 여성에 대해 갖고 있던 멸시적 시각을 부정하고 제거한 것입니다.
• 이슬람은 여성의 삶의 모든 단계에서 그녀들을 존중하라는 부르심을 가져왔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는 말씀하셨습니다: “여성들에게 친절하게 대해라.” [사히흐 알부카리] 또 다른 말씀에서는: “딸을 낳고 그녀를 생매장하지 않으며, 그녀를 모욕하지 않고, 아들을 그녀보다 우대하지 않는 사람은, 그 딸 덕분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아흐마드 전함].
- 전쟁: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에는 많은 전쟁 이야기들이 등장하며, 이 중에는 아이, 여성, 노인, 남성 등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 여호수아 6:21 등).
이러한 개념은 오늘날의 무자비한 살육과 학살,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 반면 이슬람은 전쟁 중에도 관용을 강조합니다 — 배신을 금지하며, 아이, 여성, 노인, 비전투원을 죽이는 것을 엄격히 금합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젖먹이, 아이, 여성, 노인을 죽이지 말라.” [알바이하키 전함] 또한, 무슬림과 싸웠던 포로들에게조차도 친절하게 대하라고 명령하였으며, 그들을 해치지 말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 참조:『이슬람의 가르침과 그것이 과거 및 현재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Islam’s Teachings and How They Solve Past and Current Problems)』
셋째:
하나님께서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를 통해 나타내신 기적들과 초자연적인 사건들 —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도우시고 지지하신 증거로 작용합니다.
이 기적들은 다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 가시적인(물리적인) 기적들 — 예: 예언자의 손가락 사이에서 물이 솟아나온 기적.
이 기적은 믿는 자들이 갈증으로 죽음에 이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 비가시적인(비물리적인) 기적들 — 예:
- 비를 내리게 해달라는 그의 기도가 응답된 일.
- 또한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들에 대한 예언을 한 것:
▪ 이집트,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등의 정복에 대한 예언, 그리고 이슬람 통치권의 확장에 대한 예언.
▪ 그는 또한 팔레스타인에 있는 아스칼론이 정복되고 가자(Gaza)에 병합될 것을 예언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가자-아스칼론(Gaza Ascal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지하드 중 가장 뛰어난 것은 국경을 지키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아스칼론에서의 지하드가 가장 뛰어나다.” [알-알바니의 『사힐 실실라』(Silsilatu Saheeha)에서 인용]
이 하디스는 미래에 이 지역이 알라의 길에서 인내와 헌신을 요구하는 위대한 지하드의 무대가 될 것임을 은연중에 시사합니다. 이는 고귀한 전사들이 인내하며 수호해야 할 장소임을 나타냅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가 예언한 모든 것들은 정확히 실현되었습니다.
-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는 지금으로부터 1400년 이상 전에 많은 과학적인 '보이지 않는 사실들(미지의 현상들)'을 예언하였으며,
현대 과학이 나중에 그것들이 진실하고 정확한 말씀이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예시 중 하나는 그분의 다음 말씀입니다:
“정액(정자)이 42일을 지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천사를 보내시고,
그 천사는 그를 형성하여 그의 청각, 시각, 피부, 살, 그리고 뼈를 창조한다…” [무슬림이 전함]
현대 의학은 밝혀냈습니다 — 임신 7주차 초반, 정확히 수정 후 43일째부터
태아의 뼈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인간의 형태가 점점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이로써 예언자(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말씀이 현대 과학에 의해 확증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꾸란의 기적 — 그것은 심판의 날까지 남아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으로,
그 독특한 문체는 당대의 뛰어난 아랍 웅변가조차도 가장 짧은 장(수라) 하나조차 꾸란과 비슷하게 만들어내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성꾸란은 수많은 ‘보이지 않는 사실들(미지의 현상들)’을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다양한 과학 분야의 학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는데, 그 예로 **성스러운 꾸란의 천문학적 사실들에 대해 깊은 감탄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이들 중에는 일본 도쿄 천문대의 소장인 요시히데 코자이 교수가 있습니다**가 있습니다.
예시 중 하나는 다음 꾸란 말씀입니다:
“우리는 힘으로 하늘(우주)을 창조하였고,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확장시키고 있다.” [아드자리야트 51:47]
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학은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정밀하고 놀라운 말씀입니까!
꾸란은 지식과 깊은 숙고로의 부르심이며,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인간에게 내리신 계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읽어라, 창조하신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 [알알라끄 96:1]
‘읽는 것’은 지식과 이해의 길이며, 이는 인류가 모든 삶의 분야에서 발전할 수 있는 핵심 열쇠입니다.
📚 참조:『이슬람과 현대 과학의 발견들 ―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예언자성과 사도직의 증거 (Islam and the Discoveries of Modern Science as the evidence and proofs of the prophethood and messengership of Muhammad (peace be upon him)』
- 논리적 관찰:
앞서 언급한 내용들은 모든 수준의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공정한 기준입니다.
이를 통해 어떤 예언자나 사도의 진실성과 그의 메시지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에게 이렇게 물었다면:
“당신은 왜 어떤 예언자의 예언자직을 믿습니까? 그가 보여준 기적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도 말이죠?”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의 기적을 전한 전승자들의 연속적인 증언들 때문입니다.”
✅ 이러한 대답은 논리적으로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를 믿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적들을 전한 연속적이고 신뢰할 만한 증언들이 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그의 전기(생애)를 통해 그의 부름의 진실성이 명확해집니다:
1️- 그는 항상 자신이 부르던 바를 스스로 실천하려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
예: 숭배 행위, 고귀한 가르침, 숭고한 도덕, 경건함, 그리고 이 덧없는 세상에 대한 금욕.
2️-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는 메카 사람들로부터 부와 왕권, 명예, 가장 고귀한 여성들과의 결혼 제안을 받았지만, 그 대가로 그의 부름을 포기하라는 조건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 그의 부름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숭배하라, 우상 숭배를 거부하라, 선을 명하고 악을 금하라.
그는 그 대가로 고통과 적대, 박해, 그리고 전쟁까지도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감내하였습니다.
3️- 그는 자신의 동료들과 민족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나를 과하게 칭송하지 말라, 기독교인들이 마리아의 아들을 과하게 칭송한 것처럼.
나는 단지 한 명의 종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종이자 그분의 사도’라고 말하라.” [사히흐 알부카리]
4️- 하나님께서는 그분(예언자)을 보호하셔서 그의 메시지를 완전히 전달하게 하셨고, 마침내 이슬람 국가를 세워 그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 이 모든 증거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메신저라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명기 33장 2절에서, 다음 구절:
“그가 파란(Paran) 산에서 빛났고, 만성도(聖徒)들과 함께 왔다” 중에서 아랍어 번역본에서 **[그가 만명의 성인들과 함께 왔다]**는 부분이 생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다음의 구절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가 파란 산에서 빛났고”,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예언과 흡사합니다 — 마치 태양이 떠오르며 수평선에 그 빛이 퍼지는 장면처럼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1장 2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됩니다: “이스마엘은 파란 광야에 거주하였다” — 그리고 전승에 의해 확실히 전해진 바, 이스마엘(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은 히자즈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파란 산’은 메카에 위치한 히자즈의 산들이며, 이것은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가 피를 흘리지 않고 정복자로서 메카로 돌아왔을 때, 만 명의 동료들과 함께 했던 역사적 사실과 완벽히 일치합니다.
- 이 생략된 구절은 다음 영어 성경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 (KJV), 아메리칸 스탠다드 버전 (ASV), 앰플리파이드 바이블 (AMP).
또한 시편 84장 6절의 순례자들의 찬송가에서, **(바카 Baca)**라는 단어가 아랍어 번역에서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표현이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향한 이슬람 순례(하지)의 직접적 언급임이 불분명해졌습니다.
꾸란에서는 메카를 **“바카(Bakkah)”**라고 부릅니다 ([알이므란 3:96])
그리고 이 이름은 킹 제임스 버전 성경을 포함한 일부 영어 번역본들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Valley of Baka]라는 표현에서 Baka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이는 고유 명사임을 의미하며, 고유 명사는 번역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 참조: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는 참으로 하나님의 예언자임이 틀림없다 (Muhammad – Truly the Prophet of Allah)』
이슬람의 중용성과 보편성 이슬람은 모든 인류를 포용하고, 각자의 권리를 인정하며, 모든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믿을 것을 권장하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 이슬람은 모든 면에서 중용을 지키며, 특히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조화롭고 균형 있게 설명합니다:
예수(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예언자직을 믿으며, 그의 기적적인 탄생과 요람에서 말한 기적도 하나님의 표징으로 인정합니다.
이 표징은 또한 그의 어머니를 유대교가 가한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그녀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고, 나아가 예수의 예언자성과 사도직에 대한 증거로 작용합니다.
🧠 이것은 이성과 논리에 부합하는 중용적 설명입니다, 다음과 같은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합니다:
1. 유대교의 극단적 부정 — 예수의 사명 자체를 부정하고, 그의 탄생을 간통으로 매도하며, 그의 어머니를 모욕함.
2. 기독교의 과도한 주장 — 예수를 신으로 신격화함.
- 논리적 설명:
순수한 본성과 건강한 이성은 인간과 동물(예: 소) 사이의 결합을 통해 반인반수 존재를 만들자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창조된 인간의 본성에 하나님의 본성을 결합시킨다는 개념은 더욱 불합리합니다.
신성은 무한하며,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나며 수치 부위에서 나왔고, 침 뱉음, 뺨 맞음, 옷을 벗김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한 존재라고 믿는 것은
위대한 하나님께 결코 어울리지 않는 모욕적인 믿음입니다.
예수는 음식을 먹었고, 배설이 필요했습니다.
잠을 자고, 오물을 배에 지닌 존재가 하나님일 수는 없습니다.
작은 그릇에 바다 전체를 담을 수 없듯이, 연약한 피조물인 여인의 자궁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담는다는 것은 비이성적 주장입니다.
또한, 누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있습니까?
- 기독교 성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명확히 언급합니다:
신명기 24:16: “부모는 자식 때문에, 자식은 부모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 말 것이요. 각자는 자기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에스겔 18:20: “죄를 지은 자가 죽을 것이요. 아들은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않고, 아버지도 아들의 죄를 담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담이 금지된 나무에서 먹은 죄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원죄를 짊어진다는 믿음은 성경의 본문과도, 이성과도 맞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아담이 단지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은 불복종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십자가형과 살해가 필요하다고 가정한다면, 왜 죄를 지은 아담 자신이 아닌, 설교자이자 의로운 교사이며 경건하고 어머니에게 헌신적이었던 그리스도가 대신 십자가형과 살해를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더 나아가, 왜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화신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까?
아담 이후 인류가 지은 많은 대죄에 대해서도 또 다른 신의 화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인류는 수천 명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한 아담을 직접 용서하실 수 없었단 말입니까?
분명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가 아버지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신성하다면, 부모 모두 없이 창조된 아담은 더 높은 신성을 지녔다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가 기적을 보였기에 신이라면,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와 다른 예언자들도 기적을 보였는데, 그들도 신으로 여겨져야 합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 중요한 논리적 설명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신적 구속자(속죄자)**로 주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 유한(죽을 수 있음) 또는 무한(죽을 수 없음).
1️. 예수의 본성이 유한하다면: 그는 죽을 수 있는 피조물이므로, 신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따라서 그가 신이자 구속자라는 주장은 무효입니다.
2️. 예수의 본성이 무한하다면 (즉, 신이라면):
그는 죽지 않았으므로, 속죄(구속)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우리가 앞서 논리적으로 설명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는 믿음의 오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오류는 인도에서의 크리슈나(Krishna), 동아시아에서의 부처(Buddha), 그리고 **고대 이집트의 호루스(Horus)**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반복된 신화입니다 — 심지어 그들의 이야기는 예수보다 훨씬 오래된 전승입니다.
- 결론적으로: 이런 믿음은 단지 고대 민족들의 전승과 신화, 전설에서
차용된 기반 없는 개념일 뿐입니다 — 즉, 하나님의 계시나 이성적 증거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설명: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신성을 주장하지만, 예수께서 복음서 어디에서도 단 한 번도 **“나는 하나님이다” 또는 “나를 예배하라”**는 명확한 표현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여기거나 숭배하라고 가르친 적도 없습니다.
반대로,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 마태복음 21장 11절: “무리가 이르되, ‘이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더라.”
→ 이는 예수가 예언자로 불렸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또한 예수께서 기도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예수께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 그분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에게 절을 올리며 기도하셨습니까?
- 그의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바로 이것이 이슬람에서의 기도 방식입니다 — 이슬람은 예수(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를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존중하며, 그가 가르친 참된 방식(하나님께 절하고 순복하는 기도)을 따릅니다.
✅ 예수 그리스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로 서로 인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 2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는 이슬람에서 사용하는 인사법과 동일하며, "평화가 당신 위에 있기를" 라고 인사하고, "당신 위에도 평화가 있기를" 이라고 응답합니다.
• 많은 이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이전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설명: 성스러운 꾸란에는 ‘마르얌(마리아) 장’이라는 독립된 장(수라)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그들에게 평화가 있기를)**에 대한 존경과 칭송이 성경보다 더 아름답고 고결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의 지위를 높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고귀한 예언자임을 믿고, 그가 전한 가르침을 따르도록 부릅니다 — 이 가르침은 무함마드(그에게 평화가 있기를)가 전한 이슬람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책들을 참고하십시오: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조용한 대화 (“A Quiet Dialogue Between a Christian and a Muslim.”)』
『왜 이슬람을 종교로 선택해야 하는가?(“Why choose Islam as a religion?”)』
결론적으로, 이번 발표는 객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알라께서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이성을 주셨다는 명백한 이치와, 순수한 영혼이 고귀한 신념을 추구한다는 점에 부합합니다. 그렇기에 무함마드 예언자(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초청과 이슬람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를 통해 진리를 알게 되었으면서도 아직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 당신은 왜 진심으로 이슬람을 깊이 생각해 보고, 그것이 당신이 찾고 있는 모든 질문의 답—특히 다른 종교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알라(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제공하는지 살펴보지 않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신앙과, 진리를 찾기 위한 선택에 대해 알라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이슬람을 선택함으로써, 나의 모든 질문에 논리적이고 쉬운 답을 제공하고, 어떤 특정한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이성을 강요하지 않으며, 그리고 그리스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자연의 본성에 부합하고 명백한 이성과 논리적 사고에 어긋나지 않는 올바른 방식으로—그분에 대한 나의 사랑과 존경을 유지하며, 이슬람에서 그리스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는 매우 높고 고귀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그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그녀에게 평화가 있기를) 또한 마찬가지이며, 내가 어떤 예언자에 대한 믿음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알라께서 우리 모두를 선과 진리로 인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